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과 공개된 가격정책은 시장 배경을 설명하는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월요일 아침, 유통업체 세광철강의 회의실에는 철근 판매표보다 출고표가 먼저 펼쳐졌다. 영업본부장 한정우는 9월 마지막 주 숫자를 보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국산 철근 유통가격은 톤당 85만 원 안팎이었다. 지난주보다 약 5,000원 낮았다. 수입산은 79만5,000원 수준까지 내려와 있었다. 반면 제강사들은 공급을 줄이고 있었고, 일부 제강사는 10월 고시가격을 톤당 90만 원으로 다시 올릴 계획을 내놓았다. 가격표만 보면 다음 달은 올라야 했다. 주문서만 보면 그렇지 않았다.
“이번 주 들어온 신규 발주가 얼마나 됩니까?”
영업팀 김과장이 서류를 넘겼다. “필요 물량 위주입니다. 선매입하겠다는 고객은 거의 없습니다.”
“고시가격 오른다는 얘기는 다 알고 있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객들은 고시보다 하치장 가격을 봅니다. 지금 85만 원 선에서 움직이는데 90만 원 얘기를 먼저 꺼내면 전화를 끊습니다.”
한 본부장은 잠시 창밖을 봤다. 야드에는 출고를 기다리는 철근 다발이 층층이 놓여 있었다. 가을 성수기라면 빈 공간이 먼저 보여야 했다. 올해는 재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격은 올린다는데 주문은 늦어졌다
회의에는 구매팀장 윤미정과 재무팀장 서경호도 들어왔다. 윤 팀장은 제강사별 출하 조건을 정리해 놓고 있었다.
“제강사들은 공급 속도를 더 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휴동도 이어지고 있고, 유통향 고시가격을 지키겠다는 의지도 강합니다.”
서 팀장이 물었다. “그럼 지금 조금 더 사두는 게 맞는 겁니까?”
윤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공급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수요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9월 중순 주요 제강사의 판매 진도율도 51% 수준에 그쳤습니다. 재고는 31만 톤을 넘겼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한 본부장이 끼어들었다. “공급을 줄여도 재고가 늘어난다는 건, 지금은 생산량보다 주문 속도가 더 느리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매입단가보다 회전일수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수치가 말하는 방향은 단순하지 않았다. 국내 주요 철근 제강사의 생산능력은 약 1,112만 톤으로 지난해보다 60만 톤 줄었지만, 올해 1~7월 명목소비를 연간으로 환산하면 약 676만 톤 수준이었다. 수출을 포함한 연간 환산 판매량도 약 774만 톤이었다. 생산능력과 실제 판매 규모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격이 남아 있었다. 설비 폐쇄와 교대제 전환, 휴동이 이어져도 시장이 느끼는 공급과잉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였다.
서 팀장은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말했다. “가격이 1만 원 오른다고 가정해도, 재고가 한 달 더 묶이면 자금비용과 창고비가 붙습니다. 회전이 안 되면 오른 가격이 우리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한 본부장이 물었다. “그럼 이번 주 매입 기준을 어떻게 잡아야 합니까?”
윤 팀장은 짧게 답했다. “팔린 물량만큼만 다시 채우는 겁니다.”
하치장에서는 가격보다 트럭 숫자가 먼저 보였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한 본부장은 물류팀장 박성진과 야드로 내려갔다. 박 팀장은 철근 다발 사이를 걸으며 출고 순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오전부터 대기 차량이 줄을 섰을 시간이었다. 이날은 몇 대가 들어왔다가 금세 빠졌고, 다음 차량이 들어오기까지 간격이 길었다.
“오늘 출고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박 팀장이 말했다. “지난달보다 조용합니다. 현장들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갑니다. 한 번에 넉넉히 실어가던 고객도 요즘은 나눠서 부릅니다.”
“창고는 버틸 만합니까?”
“공간은 있습니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라 오래 있는 재고입니다. 오래 묶인 규격부터 빼야 합니다.”
한 본부장은 적치된 철근 끝단을 바라봤다. 생산된 철근은 모두 같은 회색이었지만, 영업팀이 보는 재고는 달랐다. 어떤 물량은 이미 고객이 정해져 있었고, 어떤 물량은 가격이 조금만 어긋나도 몇 주씩 남았다. 같은 톤수가 같은 위험을 뜻하지 않았다.
박 팀장이 출고표를 접으며 물었다. “가격 오른다고 하니까 다음 주에는 좀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한 본부장이 답했다. “오를 것 같아서 사는 시장이면 벌써 움직였겠죠. 지금은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날에만 가져갑니다.”
수입재도 변수였다. 인천 보세창고의 수입 철근 재고는 2만5,600톤으로 전주보다 13.8% 줄어 10주 만의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공급이 많지 않은데도 수입산 유통가격은 톤당 79만5,000원 수준이었다. 물량이 줄었다는 사실만으로 가격이 오르지 않는다는 점이 시장의 약한 수요를 다시 보여줬다.
국산 쪽도 비슷했다. 일부 제강사는 9월 말까지 톤당 89만 원의 고시가격을 유지하고 10월 1일부터 90만 원으로 올릴 계획을 세웠지만, 시중 유통가격은 그보다 낮았다. 한 본부장은 이 차이를 단순한 할인폭으로 보지 않았다. 제강사는 원가와 수익성을 지키려 했고, 유통은 실제 주문이 들어오는 가격을 따라가야 했다. 두 가격 사이의 간격은 협상력이 아니라 시장의 속도 차이였다. 제강사가 먼저 움직여도 현장 발주가 늦으면 유통가격은 바로 따라가지 못했다.
현장 구매팀은 한 달 뒤보다 이번 주를 봤다
점심 무렵, 건설사 자재구매팀에서 전화가 왔다. 상대는 여러 현장의 철근 구매를 담당하는 이재훈 과장이었다.
“다음 달 가격이 오른다는데, 이번 주에 좀 더 잡아두는 게 낫습니까?”
한 본부장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현장 투입 일정이 확정된 물량이 얼마나 됩니까?”
“이번 주와 다음 주 것은 확정됐습니다. 그 뒤는 공정이 조금 밀릴 수 있습니다.”
“그럼 확정된 것부터 가져가시죠.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공정보다 먼저 살 필요는 없습니다.”
이 과장이 웃었다. “판매하는 쪽에서 그렇게 말하면 이상한데요.”
“지금은 많이 파는 것보다 다시 주문받는 게 중요합니다. 창고에 쌓아두면 서로 부담입니다.”
전화를 끊은 한 본부장은 영업팀에 고객별 출고 예정일을 다시 받으라고 지시했다. 가격 협상표보다 공정 일정표를 먼저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10월 고시가격이 90만 원으로 올라가더라도 현장 투입이 늦어지면 구매 시점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공급조절이 강화돼 특정 규격이 부족해지면 가격보다 납기가 먼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영업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는 일이 아니라 두 위험 사이에서 고객의 날짜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남은 결정
오후 네 시, 네 사람은 다시 회의실에 모였다. 한 본부장은 오전과 다른 표를 화면에 띄웠다. 기존에는 제강사별 매입가격과 판매목표만 있었지만, 새 표에는 고객별 확정 출고일, 미확정 물량, 장기재고 규격이 추가돼 있었다.
“결론 내리겠습니다. 10월 가격 인상에 대비한 선매입은 하지 않습니다.”
윤 팀장이 확인했다. “정상 보충만 합니까?”
“예. 확정 출고분과 회전 빠른 규격만 채웁니다. 장기재고 규격은 추가 매입을 멈춥니다.”
서 팀장이 말했다. “그러면 가격이 실제로 오를 경우 매입원가는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한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용은 감수합니다. 대신 팔리지 않는 재고를 먼저 떠안지는 않겠습니다.”
박 팀장이 덧붙였다. “출고 기준으로 재고를 보면 야드 운영도 훨씬 단순해집니다.”
결정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비용과 기회를 동시에 계산한 선택이었다. 가격이 오르면 회사는 더 비싼 철근을 사야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수요가 계속 늦어지면 현금을 재고로 묶지 않아도 됐다. 제강사의 공급조절이 실제 시장가격을 끌어올리는지, 연휴 이후 건설현장 발주가 되살아나는지 확인할 시간을 산 셈이었다.
퇴근 무렵 한 본부장은 야드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철근 다발은 아침과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가 보는 의미는 달라져 있었다. 재고는 팔리지 않은 물량이 아니라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약속이었다. 가격이 85만 원인지 90만 원인지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언제 가져갈 것인지였다.
철근시장의 가을은 달력보다 늦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강사는 가격을 올리고 생산을 줄였고, 수입재 재고도 감소했다. 그럼에도 주문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 본부장은 마지막 출고표를 덮으며 말했다.
“지금은 가격을 맞히는 장사가 아니라, 재고가 머무는 시간을 줄이는 장사입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철근(SD400·10mm, 하치장 도착도) | 톤당 85만 원 안팎 | 약 5,000원 하락 |
| 수입산 철근 | 톤당 79만5,000원 수준 | 원자료상 별도 수치 미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