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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㊾ — 인상 공문 뒤에 주문이 멈췄다

H형강이 적치된 철강 유통 야드에서 영업·출하 담당자가 상차와 출고 일정을 점검하는 현장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오전 첫 출하차가 야드 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영업팀장 정민호의 전화가 울렸다. 오래 거래해 온 가공업체 구매팀장이었다. 평소라면 규격과 납기를 먼저 물었을 사람이 그날은 가격부터 확인했다.

“이번 주부터 정말 올리는 겁니까?”


정 팀장은 책상 위 공문을 다시 봤다. 제강사의 중소형 H형강 판매가격 인상 방침이 적혀 있었다. 시장에서는 톤당 121만~122만원 수준의 적용이 목표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9월 넷째 주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시세는 톤당 117만원에서 움직이고 있었고, 실제 성약은 드물었다.


“인상 방침은 나왔습니다. 다만 시장이 그 가격까지 바로 움직이는지는 조금 더 봐야 합니다.”

상대방은 잠시 침묵했다. “그럼 오늘 주문하면 어느 가격을 봐야 합니까?”


정 팀장은 바로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필요한 규격과 납기부터 주십시오. 이미 확정한 물량까지 뒤집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데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공문 한 장만 보고 거래 방식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호가는 올랐는데 출하표는 조용했다

전화를 끊고 정 팀장은 출하장으로 내려갔다. 출하담당 김과장은 전날 출력한 배차표를 들고 있었다. 평소 이 시간이라면 규격별 상차 순서를 정하느라 무전기가 계속 울렸지만, 이날은 몇 건의 확정 출하만 남아 있었다.


“오늘 추가 배차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문의는 오는데 확정이 안 됩니다.”

“가격 때문입니까?”


김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가격도 가격인데 현장에서 물량을 당겨 쓰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받아가겠다는 분위기입니다.”

야드에는 중소형 H형강이 규격별로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재고가 부족해서 못 파는 시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재고의 속도였다. 판매가격을 올리면 마진은 나아질 수 있지만 거래가 멈추면 재고 회전이 느려진다. 그렇다고 약한 수요를 이유로 먼저 가격을 낮추면 막 시작한 인상 시도가 무너질 수 있었다.


재무팀 박부장이 현장으로 내려왔다. “이번 달 말 채권 회수표 다시 봤습니다. 신규 매출을 늘리는 것보다 기존 거래처 결제일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합니다.”

정 팀장이 물었다. “가격을 올리면 외상기간을 더 달라는 요청도 나오겠죠?”

“그게 제일 나쁩니다. 높은 가격에 팔고 돈을 늦게 받으면 숫자만 좋아 보입니다.”


김과장이 야드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철 가격은 또 내린다면서요?”

박부장이 답했다. “제강사들이 28일부터 철스크랩 구매가격을 톤당 1만원 더 내린다는 방침입니다.”

정 팀장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제품가격을 올리려는 논리와 원료가격을 더 낮추려는 움직임이 한 시장 안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었다. 원가 부담과 수요 부진, 재고 압박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을 주고 있었다.


오래 거래한 사람일수록 먼저 묻는 것

점심 무렵, 아침에 전화했던 가공업체 구매팀장이 직접 사무실로 찾아왔다. 두 회사는 여러 해 동안 거래해 왔다. 시장이 오를 때도 내릴 때도 서로 급한 규격을 맞춰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말은 더 짧았다.


“정 팀장님, 우리한테 이번 인상 전부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저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을 안 올리면 여기서도 문제 아닙니까?”


정 팀장이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가격보다 약속을 먼저 정하려고 합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이미 확정된 물량과 새로 문의하는 물량을 섞지 않는 겁니다. 확정된 건 기존 조건대로 가고, 새 물량은 출하일 기준으로 다시 협의하겠습니다.”


구매팀장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면 우리가 다음 주에 다시 물어봐도 오늘 얘기를 뒤집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확정한 건 뒤집지 않습니다. 대신 확정하지 않은 물량까지 오늘 가격으로 묶어달라고 하시면 저희도 못 받습니다.”

상대방이 한참 생각한 뒤 말했다. “그 정도면 됩니다. 우리도 현장 진도가 확실하지 않은 물량까지 미리 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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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팀장은 그 대답에서 가격 이상의 신호를 읽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가장 싼 톤당 가격만이 아니었다. 이미 합의한 조건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는 확신, 필요한 날에 규격을 맞춰 받을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시장이 흔들릴 때 서로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확신이었다.

영업사원 최대리가 회의가 끝난 뒤 물었다. “그러면 오늘은 신규 계약을 많이 못 받는 겁니까?”


정 팀장이 답했다. “많이 받는 게 목표였으면 가격부터 깎았겠지.”

“그럼 목표가 뭡니까?”

“다음 주문이 우리한테 다시 오게 만드는 겁니다.”


야드에서 확인한 한 차분의 무게

오후 두 시가 지나자 정 팀장은 최대리와 함께 다시 야드로 내려갔다. 구매팀장이 요청한 규격은 당장 출하할 수 있었지만, 인상 기대만 믿고 재고를 더 쌓을 상황은 아니었다. 건설 수요가 계절적인 성수기로 들어섰다는 말과 달리 실제 주문은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규격만 가져가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었다. 시장 전체의 호가가 한꺼번에 움직이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최대리가 재고표를 보며 말했다. “이 규격은 지금 나가면 다음 주문 때 다시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매입 담당한테 자동 발주 걸지 말라고 했어.”

“가격이 더 오르면 늦는 것 아닙니까?”


정 팀장은 H형강 적치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오를 수도 있지. 그런데 가격이 오른다는 이유로 안 팔리는 규격까지 채우면 그게 더 늦는 거야.”

출하담당 김과장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공장 쪽에서는 공급 조절 얘기도 계속 나옵니다. 그래도 야드 체감은 아직 부족 쪽은 아닙니다.”

정 팀장이 물었다. “오늘 같은 날 우리가 먼저 물량을 잠그면 고객이 따라옵니까?”

“지금은 반대인 것 같습니다. 고객이 주문을 확정해야 우리가 움직이는 쪽입니다.”


그 말은 단순했지만 의미는 컸다. 공급자가 가격을 정하고 수요가가 따라오던 시장에서는 재고를 먼저 확보하는 것이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수요가 약한 시장에서는 재고가 경쟁력이 아니라 부담이 되기도 했다. 가격을 지키기 위해 물량을 쌓는 순간, 회사는 시황이 아니라 시간과 싸우게 된다.


정 팀장은 재고표의 한 칸에 표시를 남겼다. 확정 발주가 없는 규격은 추가 매입을 서두르지 않고, 긴급 대응에 필요한 규격만 우선 유지하기로 했다. 그것은 인상에 반대하는 결정이 아니었다. 시장이 실제로 따라오는 속도만큼만 재고를 움직이겠다는 결정이었다.


그는 최대리에게 거래처별로 최근 문의와 실제 출하가 얼마나 벌어졌는지 따로 적어보라고 했다. 문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매입을 늘리지 않고, 실제 배차가 잡히는 빈도를 기준으로 재고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가격표는 하루에도 바뀔 수 있지만, 트럭이 들어오는 횟수는 시장의 체온을 숨기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가격을 지키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오후 회의에는 영업, 출하, 재무가 다시 모였다. 정 팀장은 제강사의 인상 방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 대신 거래를 세 부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이미 발주와 납기가 확정된 건은 약속한 조건을 지키고, 신규 문의는 시장 상황과 제조사 방침을 함께 반영해 제시하며, 납기가 불확실한 예상 물량은 가격을 먼저 잠그지 않는 방식이었다.


박부장이 말했다. “이렇게 하면 매출을 억지로 당겨 잡지 않아도 됩니다.”

김과장이 덧붙였다. “출하도 확정분만 준비하면 되니 야드가 덜 꼬입니다.”

최대리는 아직 아쉬운 표정이었다. “경쟁사가 먼저 낮은 가격을 부르면요?”


정 팀장이 답했다. “그 거래까지 다 잡겠다고 하면 결국 우리가 먼저 무너집니다. 대신 납기와 규격 대응이 중요한 고객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인상은 밀어붙이지 않는 겁니까?”

“아니. 가격을 지키되 거래를 끊지 않는 방법을 찾는 겁니다.”


그날 오후 늦게 아침의 가공업체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당장 필요한 규격만 우선 출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머지는 현장 일정이 정해진 뒤 다시 협의하기로 했다. 정 팀장은 큰 물량을 한 번에 잡지 못했지만, 확정되지 않은 주문을 억지로 밀어 넣지도 않았다.

통화를 마친 뒤 최대리가 말했다. “매출표만 보면 아쉽습니다.”


정 팀장은 야드 쪽 창문을 바라봤다. “이번 주 숫자는 작아도 괜찮아. 저 거래처가 다음 달에도 우리한테 먼저 전화하면 그게 더 큰 숫자야.”

9월 넷째 주 H형강 시장은 가격 인상 발표와 실제 거래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 제강사는 중소형 H형강 판매가격을 톤당 5만원 올리며 121만~122만원 수준의 적용을 목표로 했지만, 다른 대형 제강사는 즉시 인상에 동참하지 않았고 유통시세는 톤당 117만원 수준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에 제강사들의 철스크랩 구매가격 추가 인하까지 예정되면서 유통업체가 고객에게 가격 인상의 당위성을 설명하기도 쉽지 않았다.


정 팀장은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대신 회사가 지켜야 할 순서를 정했다. 먼저 약속을 지키고, 다음에 가격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물량을 받는 것. 호가가 시장을 앞서갈 때 거래가 끊기지 않게 만드는 방법은 결국 숫자보다 사람 사이의 순서를 지키는 일이었다.

퇴근 무렵 야드에는 아직 많은 H형강이 남아 있었다. 출하표도 화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전에 멈췄던 주문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다시 확인한 뒤, 필요한 만큼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시세톤당 117만원전주 대비 보합
일부 제강사 인상 적용 목표톤당 121만~122만원판매가격 5만원 인상 발표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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