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24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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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㊼ — 5주째의 빈 매입란

열연 코일 창고에서 매입과 출하 계획을 점검하는 철강 유통 실무자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경기 남부의 한 판재 유통창고. 추석 연휴를 앞둔 아침, 영업팀장 민재는 매입계획표의 열연 칸을 다섯 주째 비워 둔 채 창고를 걸었다. 국산 정품 열연은 톤당 92만~93만원, 수입대응재는 90만~91만원, 수입재는 88만원 수준까지 내려왔다. 가격만 보면 지금 사는 것이 한 달 전보다 편했다. 그런데 매입 버튼을 누르기에는 도착하지 않은 물량이 더 무거웠다. 9월 말부터 인도네시아산 530달러대 계약분이, 이어 베트남산 535~545달러 물량이 순차적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창고관리 책임자 선우가 코일 적치도를 펼쳤다. “A동 앞줄이 다음 주면 비는데, 빈자리를 바로 채울 겁니까?”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비었다고 채우면 안 돼요. 들어오는 가격이 바뀌고 있잖아요.”


“그래도 국내 정품이 92만원이면 지난달보다는 낮습니다.”

“낮은 가격과 싼 재고는 다른 말이에요. 우리가 오늘 92만원에 사도 다음 주 88만원짜리 수입재가 깔리면 고객은 그쪽 숫자부터 봅니다.”


창고 한 칸을 비우는 가격

오전 회의에서 재무팀 과장 지현은 더 노골적이었다. 분기말을 앞두고 외상매출 회수일수가 길어진 거래처 명단을 화면에 띄웠다. 민재가 가져온 매입안은 국산 정품을 평소 물량의 절반만 확보하자는 내용이었다. 재무팀은 그 절반도 많다고 봤다.


지현이 물었다. “이번 물량을 사면 언제 현금으로 돌아옵니까?”

민재가 답했다. “기존 고객 기준이면 45일 안쪽입니다.”

“기존 고객이 지금도 같은 양을 삽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수요가들은 가격이 더 내려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필요 물량만 잘라서 사고 있었다. 건설과 일반 제조의 체감 수요도 강하지 않았다. 판매가격이 내려가는 동안 재고회전까지 느려지면, 싸게 산 코일도 금융비용을 먹는 재고가 된다.


지현이 다시 말했다. “나는 매입단가보다 회수기간이 더 걱정됩니다. 연휴 뒤 저가 수입재가 실제로 풀리면 우리가 먼저 가격을 내려야 할 수도 있어요.”

민재는 표 한쪽에 550달러라고 적었다. 최근 동남아 신규 오퍼는 11월 말적 기준 550달러대로 올라왔다. 이미 계약된 530~545달러 물량보다 높았다. 앞으로 들어올 물량만 보면 바닥이 가까워 보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시장이 ‘앞으로의 550달러’보다 ‘곧 도착할 530달러대’를 먼저 가격에 반영한다는 데 있었다.


도착하지 않은 코일과의 협상

점심 무렵, 민재는 수입상 태호와 통화했다. 태호는 11월 말적 신규 물량을 지금 잡아야 한다고 재촉했다.

“550달러면 지난번보다 비싸지만, 다음 오퍼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민재가 웃었다. “그 말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내 창고에는 다음 달에 더 싼 계약분이 들어옵니다.”

“그 물량만 보고 계속 기다리면 연말 물량을 놓칠 수 있어요.”

“그래서 전량을 미루겠다는 게 아닙니다. 도착시점을 나누자는 겁니다. 11월 말적을 한 번에 잡지 말고 절반만 열어 주세요.”


태호가 잠시 계산했다. “절반이면 조건이 조금 달라집니다.”

“가격보다 옵션이 중요합니다. 입항이 몰리면 한 주 차이가 창고 회전 한 번을 바꿉니다.”

통화를 끝낸 뒤 이번에는 자동차 부품용 소재를 사는 고객사 구매팀에서 전화가 왔다. 고객은 90만원 아래로 내려오면 구매량을 늘리겠다고 했다. 민재는 즉답하지 않았다. 국산 정품과 수입대응재, 수입재의 가격층이 이미 벌어진 상태에서 단순히 최저가에 맞추면 기존 고가재고의 손실이 한꺼번에 현실화될 수 있었다.


“가격을 한 번에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납기를 나눠 드리죠. 이번 주 필요한 양은 기존 재고에서, 연휴 뒤 물량은 입고 상황을 보고 다시 가격을 잡겠습니다.”

고객이 물었다. “그러면 지금 확정할 수 있는 건 얼마입니까?”

“필요량의 60%까지입니다. 나머지는 시장가격을 다시 보죠.”

“가격이 오르면요?”

“그 위험은 제가 일부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지금 필요하지 않은 물량까지 미리 가져가라고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고객은 잠시 망설인 끝에 제안을 받았다. 민재에게는 판매량을 크게 늘리지 못하는 선택이었지만, 할인으로 전량을 밀어내는 것보다 재고 원가와 거래처 신뢰를 동시에 지키는 방법이었다.


전화를 끊고 민재는 출하장으로 내려갔다. 오전보다 트럭이 늘었지만 상차량은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출하 담당 대리는 한 거래처가 예정 물량의 절반만 가져갔다고 보고했다. 가격이 더 내려갈 것 같다는 이유였다. 민재는 주문서에 찍힌 취소선보다 남은 물량을 오래 바라봤다. 거래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구매 시점이 뒤로 밀리고, 한 번에 사던 고객이 두세 번으로 나눠 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통업체에게 그 시간차는 곧 자금의 시간차였다. 코일이 일주일 더 창고에 있으면 보관비와 금융비용이 붙고, 같은 기간 다른 규격을 들여놓을 공간도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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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가 다가왔다. “저쪽 2.3밀리 재고가 예상보다 안 빠집니다. 다음 주 수입재가 들어오면 같은 규격이 겹칩니다.”

민재가 물었다. “오늘 현금 조건으로 내보내면 어느 정도까지 움직일까요?”

“조금 낮추면 반응은 있겠지만, 그 가격이 다른 고객한테 퍼질 겁니다.”

“그게 제일 문제죠. 한 번 낮춘 가격이 내일 기준가격이 되니까.”


민재는 영업사원들에게 모든 거래처에 같은 할인율을 제시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재고가 오래된 규격, 결제기일이 짧은 고객, 연휴 전 실제 가공계획이 확인된 주문을 먼저 골라내라고 지시했다. 가격을 낮추더라도 목적 없이 시장에 던지는 물량과 창고 회전을 위해 선별적으로 파는 물량은 결과가 다르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후 두 시에는 제조사 영업담당자와 대면 협상이 잡혀 있었다. 상대는 다음 달 배정물량을 줄이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해외 생산자들의 인상 움직임과 원료·에너지 부담을 감안하면 현재 유통가격만 보고 출하가격을 크게 낮추기 어려웠다. 중국 주요 철강사가 10월 판재류 내수가격을 100~200위안 올린 것도 협상 테이블에 올라왔다. 민재는 해외 인상 신호를 인정하면서도 국내 유통의 재고 사정은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제조사 담당자가 말했다. “해외가 올라오는데 지금 물량을 줄이면 반등할 때 다시 비싸게 사셔야 합니다.”

민재가 답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등보다 먼저 저가 도착물량을 통과해야 합니다.”

“국산재는 납기와 품질이 안정적입니다. 단순히 수입가격과 비교할 문제는 아니죠.”

“그래서 국산을 끊지 않습니다. 다만 예전처럼 창고를 가득 채운 뒤 팔 생각은 없다는 겁니다.”


협상은 단가보다 배정 방식에서 풀렸다. 민재는 월간 총량을 한 번에 확정하는 대신 1차 출하분을 먼저 받고, 나머지 물량은 실수요 주문과 수입재 입항 상황을 확인한 뒤 확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제조사 담당자는 처음에는 난색을 보였지만, 완전한 주문 취소보다 물량을 남겨 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양측은 첫 배정을 축소하고 후속 물량을 다시 협의하기로 했다. 민재가 얻은 것은 낮은 단가가 아니라 시간을 살 수 있는 계약조건이었다.


회의실로 돌아오자 지현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신규 매입을 절반으로 줄이면 단기 매출 기회는 줄지만, 연휴 뒤 수입재가 88만원 수준의 기준선을 유지할 경우 기존 재고와 신규 재고가 동시에 평가손 압력을 받는 위험도 낮아졌다. 반대로 해외 신규 오퍼가 550달러대에서 더 올라 국내 가격이 반등하면, 남겨 둔 절반을 더 높은 가격에 채워야 한다. 어느 쪽도 확실한 정답은 아니었다. 다만 손실이 한 방향으로 몰리지 않게 만드는 선택은 가능했다.


매입란에 남긴 절반

오후 네 시, 창고 앞에 빈 트레일러가 들어왔다. 선우는 다음 주 입고 예정 코일의 자리를 다시 표시했다. 민재는 오전에 비워 두었던 매입계획표를 열고 처음으로 숫자를 넣었다. 국산 정품은 평소 주간 매입량의 절반만 확보하고, 수입 신규계약도 한 번에 채우지 않고 도착 월을 나눠 잡는다는 결정이었다. 그 대신 기존 재고 중 회전이 느린 규격은 현금거래 고객에게 우선 배정하기로 했다.


지현이 최종안을 보고 물었다. “결국 절반만 사는 겁니까?”

“절반만 사는 게 아니라, 절반의 선택권을 남기는 겁니다.”

“이번 주 매출은 조금 포기해야겠네요.”

“맞아요. 대신 다음 주 가격이 더 내려와도 창고 전체가 고가재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결정에는 즉각적인 비용이 있었다. 물량을 줄인 만큼 제조사와 수입상에 대한 구매 협상력은 약해질 수 있고, 만약 가격이 예상보다 빨리 반등하면 추가 매입분은 더 비싸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민재는 지금 시장의 위험이 ‘싸게 못 사는 것’보다 ‘너무 일찍 많이 사는 것’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9월 18일 원·달러 환율은 오후 3시30분 기준 1,383.3원이었다. 원화가 7월 고점보다 강해진 구간에서 체결된 기존 수입계약은 국내 착지 경쟁력을 높였지만, 환율이 다시 오르는 흐름은 10~11월 신규계약의 원가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열연이라도 창고에 들어오는 날짜에 따라 원가가 달랐고, 고객이 보는 기준가격도 달라졌다.


마지막으로 민재는 물류팀과 입항 일정을 맞춰 봤다. 계약서의 달러 가격만 낮다고 해서 도착원가가 자동으로 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선박 일정이 밀리거나 통관이 연휴 뒤 한꺼번에 몰리면 하역과 내륙운송이 겹칠 수 있고, 창고에 같은 규격이 동시에 들어오면 싸게 산 물량이 오히려 회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수입 계약분을 도착 주차별로 나누고, 국산재는 긴급 주문과 품질 승인 고객용으로 별도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한 창고 안에서도 재고의 역할을 구분하자는 뜻이었다.

선우가 확인했다. “국산 정품은 긴급 대응용, 수입재는 가격 민감 고객용으로 나누는 겁니까?”


“그렇게 단순하게만 보지는 마세요. 고객마다 승인 규격과 납기가 다릅니다. 같은 가격표를 보여줘도 실제 선택지는 다르니까요.”

“그럼 출고 우선순위도 다시 짜야겠네요.”

“네. 오래된 재고부터 무조건 빼는 게 아니라, 할인 폭과 회수기간을 같이 보세요. 싸게 팔고 돈까지 늦게 받으면 재고를 줄여도 현금은 안 늘어납니다.”


이 지시는 영업팀에도 그대로 전달됐다. 민재는 당분간 ‘최저가 확보’를 영업 목표로 두지 않았다. 거래처별 실제 사용량과 결제조건을 먼저 확인하고, 필요한 물량만 제안하도록 했다. 가격이 하락하는 시장에서 매출을 지키려는 조급함이 과잉 판매와 장기 외상으로 이어지면, 숫자상 출하는 늘어도 회사의 현금은 더 늦게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퇴근 직전 민재는 창고 문 앞에서 적치된 코일을 한 번 더 봤다. 다섯 주 동안 가격은 내려왔지만, 매입 판단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가격이 낮아질수록 기다릴 이유가 생겼고, 해외 오퍼가 오를수록 미리 살 이유도 생겼다. 결국 그가 지킨 것은 특정 가격이 아니라 다음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유였다. 매입계획표의 빈칸은 절반만 채워졌고, 나머지 절반은 연휴 뒤 실제 입항가격과 고객 주문을 확인한 뒤 쓰기로 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열연 정품 SS27592만~93만원/t (약 665~672달러/t)중심가격 약 -1만원
열연 수입대응재90만~91만원/t (약 651~658달러/t)중심가격 약 -1만원
열연 수입재88만원/t (약 636달러/t)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동남아 신규 열연 오퍼11월 말적 550달러대/t기존 계약 530~545달러/t 대비 상승

원화의 달러 환산은 원자료에 제시된 2026년 9월 18일 원·달러 환율 1,383.3원을 단순 적용한 참고치다. 실제 거래 원가는 운임·금융비용·통관조건·결제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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