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아침 8시 10분, 호가표보다 먼저 울린 전화
형강 유통업체 세림스틸의 출하장은 아직 첫 차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야드 한쪽에는 중소형 H형강이 규격별로 쌓여 있었고, 출하담당 박진수 과장은 휴대전화 화면을 켠 채 재고표를 다시 보고 있었다. 전날까지도 업체마다 부르는 가격이 달랐다. 국산 중소형 H형강은 톤당 117만~122만원까지 호가가 벌어져 있었다. 같은 물건을 두고 5만원 차이가 나는 시장에서는 가격표보다 전화 한 통이 더 빨리 분위기를 바꿨다.
“과장님, 오늘 121만원에 바로 잡을 수 있습니까?” 건설자재 상사의 구매팀장이 물었다.
박 과장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수량이 몇 톤입니까?”
“일단 60톤입니다. 다음 물량은 현장 진도 보고 정하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영업팀 이수현 차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21만원이면 제조사 목표에는 맞는데, 오늘 바로 나갈 물량이 아니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박 과장은 통화를 잠시 막고 물었다. “납기가 언제야?”
“다음 달 첫째 주입니다. 문제는 상대가 일본산 104만원과 베트남산 112만원도 같이 보고 있다는 겁니다.”
국산 가격이 오른 뒤 시장은 단순히 ‘올랐다’고 정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제조사의 인상 의지는 분명했지만 실제 성약은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가격을 지키려는 공급자와 공사비를 줄여야 하는 수요가 사이에서 유통업체는 재고의 시간까지 계산해야 했다.
10:40
영업회의 대신 세 사람은 야드에서 직접 재고를 확인했다. 박 과장, 이 차장, 자금담당 최미정 부장이었다. 컴퓨터 화면보다 쌓여 있는 길이와 규격을 보면서 판단하는 편이 빨랐다. 수요가가 원하는 규격은 재고가 충분했지만, 문제는 결제조건이었다. 60톤을 높은 호가에 팔더라도 외상기간이 길어지면 그 사이 다른 업체가 낮은 가격으로 시장을 흔들 가능성이 있었다.
최 부장이 말했다. “가격보다 회수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달 말 현금이 묶이면 다음 매입을 못 합니다.”
이 차장이 받아쳤다. “그래도 인상 직후인데 우리가 먼저 가격을 낮추면 다른 거래처까지 다 따라옵니다.”
“낮추자는 게 아닙니다. 현금 조건이면 가격을 다르게 보자는 겁니다.”
박 과장이 야드 끝의 수입재를 가리켰다. “저 물량이 오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어. 베트남산 112만원, 일본산 104만원이면 국산을 무조건 121만~122만원에만 팔 수는 없어.”
“품질과 납기는 국산이 낫습니다.”
“맞아. 그래서 가격을 내리는 게 아니라, 고객이 돈을 더 낼 이유를 같이 팔아야 하는 거야.”
세 사람은 같은 숫자를 보고 있었지만 의미는 달랐다. 영업은 호가를 지켜야 했고, 자금은 회수기간을 줄여야 했으며, 출하는 재고를 오래 쌓아두지 않아야 했다. H형강 시장의 문제는 톤당 몇 만원이 아니라 세 개의 시계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는 데 있었다.
오후 1시 20분, 560달러가 건너온 자리
점심 직후 수입업체에서 새로운 견적 메일이 도착했다. 중국산 H형강은 가격약속과 덤핑방지조치가 유지되는 방향으로 정리되고 있었고, 4분기 최소수출가격(MIP)은 톤당 560달러로 제시돼 있었다. 전분기보다 9달러 낮고, 지난해 4분기보다는 95달러 낮은 수준이었다. 올해 1~8월 중국산 H형강 수입은 2,552톤으로 전년 동기보다 95% 이상 줄어 사실상 시장 존재감이 크게 낮아졌지만, 통관 여건이 다시 열리면 토목용을 중심으로 문의가 살아날 가능성은 있었다.
이 차장이 메일을 읽고 말했다. “중국산이 당장 많이 들어오지는 않겠지만 고객은 이 숫자를 들고 옵니다.”
박 과장이 물었다. “계약할 수 있는 가격과 실제 도착가격은 같지 않잖아?”
“그렇죠. 환율, 운임, 통상조건, 규격 승인까지 붙으면 달라집니다.”
최 부장이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장기 외상은 피해야 합니다. 수입재가 들어오는 시점에 우리 재고가 남아 있으면 가격보다 금융비용이 먼저 손실이 됩니다.”
박 과장은 아침의 60톤 주문을 다시 떠올렸다. 제조사 인상분을 그대로 지키는 것만이 정답이라면 결정은 쉬웠다. 그러나 국산 호가는 117만~122만원까지 벌어져 있었고, 실제 거래 빈도는 낮았다. 일반형강인 앵글과 찬넬도 각각 101만원, 104만원으로 전주보다 1만원씩 내려 있었다. 주변 제품이 약한데 H형강만 발표가격대로 곧장 올라가는 시장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
15:30
건설자재 상사의 구매팀장이 다시 전화했다. “결정하셨습니까? 저희는 오늘 안에 공급선을 정해야 합니다.”
박 과장은 이번에는 바로 조건을 제시했다. “121만원은 유지하겠습니다. 대신 60톤 전량이 아니라 30톤 먼저 출하하고, 잔량은 현장 진도 확인 뒤 확정하죠. 첫 30톤은 결제기간을 줄이는 조건입니다.”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가격은 그대로인데 물량을 나누자는 겁니까?”
“가격을 지키는 대신 재고와 현금의 시간을 나누자는 겁니다. 다음 달에 수입재 가격이 움직이면 그때 다시 비교하시면 됩니다.”
“일본산과 차이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납기와 규격, 현장 승인까지 같이 보셔야 합니다. 단순히 톤당 가격만 보면 저희가 불리합니다. 하지만 이번 주 현장에 확실히 넣을 수 있는 물량은 따로 계산해야 합니다.”
통화는 10분 넘게 이어졌다. 결국 첫 물량 30톤은 국산으로 확정하고, 나머지는 공정 진도에 따라 다시 협의하기로 했다. 판매단가는 지켰지만 전량 계약은 얻지 못했다. 영업실적만 보면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회사 입장에서는 더 비싼 재고를 장기간 외상으로 묶지 않았고, 고객도 수입재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공정 차질 위험을 줄였다.
16:20
첫 출하분을 싣기 위해 트럭이 야드 안으로 들어왔다. 창고관리자는 규격표와 실제 번들을 대조하고, 출하담당은 고객 현장에서 먼저 사용할 길이를 앞쪽에 배치했다. 단순히 재고를 빼는 작업처럼 보였지만, 어떤 규격을 먼저 내보내느냐에 따라 남은 재고의 판매가능성이 달라졌다. 잘 팔리는 규격만 먼저 소진하면 다음 주문에 대응하기 어렵고, 회전이 느린 규격을 억지로 섞으면 고객의 신뢰를 잃는다.
박 과장은 상차 순서를 보며 오전 협상의 의미를 다시 계산했다. 국산 H형강 가격을 지키려면 제조사 인상분만 강조해서는 부족했다. 고객이 실제로 비용을 지불하는 이유는 정시 납기, 필요한 규격의 확보, 현장 승인 가능성,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질 공급자가 있다는 점까지 포함한다. 특히 수입재가 낮은 가격으로 제시될수록 유통업체는 ‘국산 프리미엄’을 추상적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어떤 위험을 줄여주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했다.
최 부장은 상차 전표를 확인하고 말했다. “30톤이면 매출은 줄었지만 채권도 절반입니다.”
박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객이 다음 30톤을 다시 우리한테 물어볼 이유도 남았습니다.”
이 차장은 야드 밖으로 나가는 트럭을 보며 메모했다. 이번 거래의 손익은 오늘 마감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잔량이 다음 달 어느 가격에, 어떤 결제조건으로 팔리는지까지 봐야 진짜 결과가 나온다. 인상 직후의 시장에서는 한 번의 높은 가격보다 반복되는 성약이 더 중요한 이유였다.
오후 5시 05분, 야드에 남은 것은 가격이 아니었다
마지막 상차가 끝나자 박 과장은 오전의 재고표에 줄을 하나 그었다. 30톤이 빠졌지만 야드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H형강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차장에게 말했다.
“오늘 우리가 지킨 건 121만원이 아니야.”
“그럼 뭡니까?”
“다음 거래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지킨 거지. 전량을 밀어 넣었으면 오늘 매출은 컸겠지만 다음 달 가격이 바뀔 때 고객도 우리도 곤란했을 거야.”
이 차장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인상은 성공한 겁니까, 실패한 겁니까?”
박 과장은 출하장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답했다. “성약이 계속 생기면 성공이고, 호가표만 남으면 실패지.”
국산 중소형 H형강의 인상 호가는 이미 시장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건설 수요가 약하고 수입재와의 가격차가 큰 상황에서는 발표가격보다 실제 주문 빈도, 결제조건, 재고회전이 더 중요한 신호가 된다. 가격을 올리는 것은 하루면 가능하지만 그 가격에서 거래가 다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날 세림스틸이 선택한 것은 최고가격도 최저가격도 아니었다. 다음 거래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시간을 샀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중소형 H형강 | 117~122만원/t | 원자료상 별도 미제시(호가 편차 5만원) |
| 베트남산 H형강 | 112만원/t | 보합 |
| 일본산 H형강 | 104만원/t | 보합 |
| 중국 H형강 MIP | 560달러/t | 전분기 대비 -9달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