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2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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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㊺ — 싼 후판도 기다리면 비싸졌다

후판이 적치된 철강 유통 야드에서 크레인이 후판을 트럭에 상차하고 작업자가 출고를 확인하는 현장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월요일 아침, 수도권의 한 후판 전문 유통업체 창고에는 주말 사이 비가 스며든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영업팀장 한도윤은 야드 한쪽에 쌓인 SS400 후판 묶음 앞에서 출고표를 다시 세었다. 시세는 톤당 97만원 안팎까지 내려와 있었다. 전주보다 1만원 낮아진 가격이었다. 숫자만 보면 판매가 쉬워져야 했지만, 출고표의 빈칸은 오히려 늘었다. 반도체 관련 공사현장 몇 곳에서 투입 일정이 뒤로 밀리면서 이미 잡혀 있던 납품 날짜가 하나씩 지워지고 있었다.


“이 물량, 이번 주에 반은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물류주임 강태식이 송장을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현장 쪽에서 다시 연락 왔습니다. 구조물 설치가 밀려서 다음 달 초로 미뤄 달랍니다.”

“다음 달 초가 확정이야?”

“확정이라는 말은 안 했습니다. ‘일단 보류’라고 했습니다.”


한도윤은 말없이 창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후판은 코일처럼 세워둘 수도, 철근처럼 야드 여기저기로 나눠놓기도 어려웠다. 규격별로 묶인 판재가 자리를 차지하면 그 자리는 다른 물량을 받지 못한다. 판매가 늦어지는 동안 금융비용은 눈에 보이지 않게 쌓인다. 가격이 1만원 내려간 사실보다 납기가 한 달 밀리는 사실이 더 무거웠다.


창고 사무실로 돌아온 한도윤은 전산에서 재고를 원가순으로 정렬했다. 같은 SS400이라도 매입시점에 따라 장부가격이 달랐다. 한 달 전 들어온 국산재, 최근 가격이 내려간 뒤 보충한 물량, 프로젝트 지정 규격으로 묶여 다른 고객에게 쉽게 돌릴 수 없는 판재가 한 화면에 뒤섞여 있었다. 평균값만 보면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실제로 팔 수 있는 재고와 팔면 안 되는 재고는 달랐다. 영업사원은 시세를 물었고 재무팀은 회수일을 물었다. 창고는 둘 사이에서 규격별 적치공간을 물었다.


“팀장님, 96만원이면 오늘 바로 가져가겠다는 곳이 하나 있습니다.” 영업사원이 메신저 화면을 내밀었다.

“현금이야?”

“30일입니다.”

“그럼 97만원 현금하고 다시 비교해. 매출만 보면 안 돼.”


영업사원이 잠시 멈칫했다. “1만원 더 받는 대신 한 달 늦게 받는 거래가 더 나쁠 수도 있다는 거죠?”

“지금은 그걸 계산해야 해. 다음 달에 94만원짜리 재고가 더 풀리면 오늘 못 받은 돈까지 같이 묶여.”


한도윤은 화이트보드에 세 칸을 만들었다. ‘즉시 출고’, ‘프로젝트 대기’, ‘범용 전환’. 그는 가격표가 아니라 이동 가능성을 기준으로 재고를 다시 나누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 오래 머무는 후판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대출한도와 적치공간을 동시에 차지하는 자산이었다.


창고에 남은 97만원

같은 시각, 프로젝트 구매팀의 서지안 과장은 회의실 대신 현장 사무실에서 도면을 펼쳐놓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번 주에 후판 발주를 확정해야 했다. 그러나 설비 배치가 바뀌면서 일부 규격의 절단 길이가 다시 계산되고 있었다. 가격은 내려왔지만 수량을 먼저 확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산 97만원이면 지난주보다 내려왔습니다.” 구매담당 사원이 말했다.

서지안은 계산기를 두드리다 손을 멈췄다. “수입재는?”

“시중 물량은 94만원 안팎입니다. 신규 쪽은 인도네시아산이 615달러 CFR로 10월 말 들어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6천에서 8천톤 들어온다는 그 물량?”

“네. 일본산 신규 오퍼는 630달러, 중국산은 650달러대라고 합니다.”


서지안은 도면 한 장을 접어 옆으로 밀었다. “싸다는 이유로 먼저 사놓을 수는 없어. 이 현장은 규격 승인 하나 틀리면 다시 들고 나가야 해.”

그녀가 고민하는 것은 단순한 톤당 가격차가 아니었다. 국산과 시중 수입재 사이에는 약 3만원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수입재가 더 싸도 10월 말에 도착한다면 지금 필요한 규격을 대신할 수 없었다. 반대로 현장 투입이 다음 달 이후로 밀린다면 지금 국산재를 확보하는 것도 재고비용을 앞당겨 부담하는 선택이 된다. 구매팀의 계산표에는 가격보다 날짜가 더 많은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날 오전 열한 시, 한도윤에게 서지안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팀장님, 기존 발주분 중 두 규격만 먼저 받을 수 있을까요?”

“두 규격만 빼면 나머지는 언제입니까?”

“현장 공정표가 오늘 저녁에 다시 나옵니다. 나머지는 그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가격은 지금 기준으로 유지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잠깐 침묵이 있었다. “유지해 주시면 좋죠. 그런데 제가 더 걱정하는 건 가격보다 납기입니다. 지금 필요한 두 규격이 끊기면 현장이 멈춥니다.”

한도윤은 창고관리 화면을 열었다. 문제의 두 규격은 많지 않았다. 97만원에 팔면 마진은 거의 남지 않지만 현금을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나머지 규격을 계속 보관하면 창고 회전은 더 느려진다. 수입재 94만원이 시장 하단을 누르고, 10월 말에는 인도네시아산 물량까지 들어올 예정이었다. 지금 재고를 오래 끌수록 다음 가격과 비교되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지안은 구매회의가 끝난 뒤 계약 담당자에게 기존 발주서를 다시 열어달라고 했다. 전체 물량을 한 번에 받도록 되어 있던 납기 조항을 규격별 분할 납품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납기를 나누면 공급자는 관리가 번거롭고 운송비도 늘 수 있었다. 대신 프로젝트 측은 불필요한 재고를 떠안지 않아도 됐다. 그녀는 가격을 깎는 협상보다 납기를 잘라내는 협상이 이번에는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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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 납품으로 바꾸면 공급처에서 운송비를 얹어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약 담당자가 말했다.

“톤당 몇 천원 더 들어가더라도 창고에서 한 달 재우는 비용보다 작으면 바꾸는 게 맞아요.”

“그럼 수입재는 아예 빼는 겁니까?”

“아니요. 다음 달 규격은 열어둡니다. 인도네시아 물량이 실제로 들어오는지, 국내산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확인하고 결정하죠.”

“가격을 미리 고정하지 않으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서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험은 감수합니다. 지금 확정되지 않은 물량을 싸다고 사는 위험보다 작다고 봅니다.”

그녀의 판단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수입 후판은 가격만 맞는다고 바로 쓸 수 있는 제품이 아니었다. 프로젝트마다 요구하는 성적서와 규격 승인, 절단 계획, 투입순서가 달랐다. 현장에서는 조달가격이 3만원 낮다는 사실보다 필요한 날에 필요한 규격이 준비돼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구매팀이 수입재를 검토하는 이유는 국산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납기와 가격을 동시에 협상할 수 있는 선택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도착일을 사는 사람

오후 두 시, 한도윤은 재무팀 대리와 창고 책임자를 불렀다. 가격 회의를 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재고부터 현금으로 바꿀지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재무팀 대리가 먼저 말했다. “평균 원가만 보면 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래처 외상 회수기간이 늘어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번 두 규격은 현금 조건으로 바꾸면?” 한도윤이 물었다.

“그럼 1만원 낮은 판매가격보다 자금 회전 효과가 큽니다.”

창고 책임자가 끼어들었다. “문제는 남은 물량입니다. 이번 주 안에 안 나가면 새로 들어올 후판 적치 자리가 없습니다.”


한도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신규 매입은 멈추자. 프로젝트 확정분만 받는다. 기존 재고는 규격별로 고객을 다시 나눠서 현금 조건을 우선하자.”

그 시각 서지안도 현장 공정팀과 통화하고 있었다. 설비 설치는 완전히 취소된 것이 아니었다. 한 구간이 밀렸고 다른 구간은 오히려 앞당겨졌다. 후판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순서가 바뀐 것이었다.


“그럼 두 규격은 이번 주 들어와야 합니다.” 서지안이 말했다.

현장 공정팀장이 답했다. “맞습니다. 대신 두꺼운 규격은 다음 달 중순 이후면 됩니다.”

“확실합니까?”

“오늘 수정 공정표로 확정합니다.”


서지안은 메모 끝에 굵은 선을 하나 그었다. 구매량을 줄이는 것이 답이 아니라, 입고 시점을 잘라내는 것이 답이었다.

오후 네 시 반, 두 사람은 다시 통화했다.

“한 팀장님, 이번 주 두 규격은 현금 결제로 받겠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달 중순으로 분할해 주세요.”

“가격은 오늘 기준 97만원으로 가겠습니다. 다음 달 물량은 그때 시세로 다시 협의하시죠.”

“그게 낫겠습니다. 지금 가격을 묶어두는 것보다 일정이 확정된 뒤 사는 게 맞습니다.”


한도윤이 웃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싸게 파는 것보다 오래 들고 있는 게 더 비싸질 때가 있으니까요.”

한도윤은 오후 회의가 끝난 뒤 수입업체에서 보내온 오퍼 메일도 다시 열어봤다. 일본산 630달러, 중국산 650달러대라는 숫자만 놓고 보면 국내 유통가격과 단순 비교하기 어려웠다. 선적일과 도착일, 금융비용, 규격 승인 여부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10월 말 들어올 인도네시아산 6천~8천톤이 실제로 어느 지역 유통망에 풀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입항 예정’과 ‘시장에 팔리는 날’ 사이에는 또 하나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재무팀 대리가 회의자료를 정리하다 말했다. “가격이 더 떨어지면 오늘 판 게 아깝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한도윤은 출고 중인 트럭을 창밖으로 바라봤다. “반대로 오르면 오늘 안 판 게 아깝다고 하겠지. 우리는 방향을 맞히는 장사가 아니라, 틀렸을 때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장사를 해야 해.”


그 말은 영업팀에 대한 지시이기도 했다. 당분간 대량 저가판매로 시세를 쫓지 않고, 현금조건과 납기확정 고객을 우선하기로 했다. 확정 물량은 지키되 불확정 프로젝트를 위해 미리 창고를 채우지 않는다. 가격 반등을 기다리는 재고와 가격 하락을 피하려는 재고를 같은 방식으로 관리하지 않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마지막 빈칸

퇴근 무렵, 창고에서는 두 규격의 후판이 크레인에 걸려 트럭으로 옮겨졌다. 출고량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한도윤은 그 물량을 ‘할인 판매’로 보지 않았다. 보관기간을 줄이고 현금회수 시점을 앞당긴 거래였다. 그는 다음 주 신규 매입 계획에서 범용 후판을 지우고, 확정 프로젝트 규격만 남겼다. 10월 말 예정된 저가 수입 후판이 실제로 도착해 유통시장에 풀리기 전까지는 재고를 늘리지 않기로 했다.


서지안은 수정된 공정표를 파일에 끼우며 구매일정을 두 줄로 나눴다. 이번 주 필요한 규격은 국산재로 즉시 조달하고, 다음 달 물량은 수입재 도착 시점과 국내 재고 상황을 확인한 뒤 다시 비교하기로 했다. 톤당 3만원을 아끼는 것보다, 필요 없는 시점에 철판을 받아놓지 않는 편이 더 싸다는 판단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창고를 비워야 했고, 다른 사람은 창고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은 같았다. 후판 시장에서 가격은 숫자로 먼저 보이지만 비용은 시간에서 늦게 나타난다. 97만원짜리 국산재도 한 달을 기다리면 무거워지고, 94만원짜리 수입재도 필요한 날을 지나 도착하면 싸지 않다. 철판 한 장의 가격은 주문서에 적히지만, 거래의 손익은 납기표의 빈칸에서 결정되고 있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후판 SS400약 97만원/t (약 701달러/t)-1만원
수입 후판 유통재약 94만원/t (약 680달러/t)-1만원
인도네시아산 후판 신규 물량615달러/t CFR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주: 원화 가격의 달러 환산은 원자료의 9월 18일 원·달러 환율 1,383.3원을 적용한 단순 환산값이다. 실제 거래가격은 규격·지역·결제조건·납기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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