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아침 입고장에 도착한 샘플 코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다. 표면은 고르게 빛났고, 포장도 단정했다. 구매팀장 박도현은 코일 옆에 붙어 있던 서류철을 한 번 넘겨본 뒤 바로 사인을 하지 않았다. 중국산 열연 소재를 얇게 만든 뒤 아연을 입힌 HGI였다. 냉연도금강판에 붙은 잠정덤핑방지관세의 바깥에 있는 제품이었다.
“가격은 다시 확인했습니까?”
구매담당 대리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최근 오퍼가 톤당 600달러 중후반입니다. 국내 냉연 도금재와 도착 기준으로 비교하면 톤당 15만~20만원 정도 낮습니다.”
박도현은 숫자를 보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싸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객이 사는 건 가격이 아니라 규격입니다.”
생산반장 최민재가 코일 가장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두께가 얇긴 합니다. 예전 HGI하고는 다릅니다. 이 정도면 강관 쪽 일부 품목은 시험해볼 수 있겠습니다.”
박도현은 대답 대신 품질팀으로 코일 시험편을 보내라고 했다. 구매팀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계약이 아니라, 이 가격 차이가 실제 판매 가능한 차이인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샘플 코일의 가장자리
오전 열한 시, 품질책임자 이수경의 책상 위에는 두 종류의 시험편이 놓였다. 하나는 기존 냉연 소재 도금강판, 다른 하나는 새로 들어온 HGI였다. 원자료가 보여준 시장 변화는 명확했다. 중국 업체들이 0.8mm 열연강판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고 밝힌 데 이어 기술적으로는 0.6~0.7mm까지 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과거 냉연강판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두께까지 HGI가 내려오고 있었다.
“두께만 보면 예전처럼 바로 탈락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수경이 말했다.
박도현이 물었다.
“그러면 써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건 다른 말입니다. 강관처럼 필요한 두께와 강도, 내식성을 맞추면 대체 가능한 영역이 있지만, 표면 품질이나 정밀 성형이 중요한 용도는 여전히 다릅니다.”
영업팀장 윤태수가 끼어들었다.
“우리 고객 가운데 가격을 먼저 보는 곳은 분명히 관심을 가질 겁니다. 지금 국산 일반 도금강판이 110만원대이고, 시장 기준으로는 국산 아연도금강판이 112만~114만원, 수입산이 107만~109만원입니다. 그런데 중국산 HGI는 그보다 더 낮은 가격 매력이 있잖아요.”
이수경은 시험편을 뒤집었다.
“가격이 낮다고 승인 절차까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한번 납품하고 나서 성형 문제나 표면 문제가 생기면 다음 거래부터는 가격 차이보다 신뢰 손실이 더 큽니다.”
윤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시장이 기다려주지는 않습니다. 이미 월 2만5000톤 안팎이 들어온다는 얘기입니다. 공급사는 월 5만톤까지도 가능하다고 했다지요.”
박도현은 그 말에서 오히려 위험을 읽었다. 싸고 많이 들어올 수 있는 제품은 구매팀에는 기회지만, 잘못 잡으면 재고가 되는 속도도 빠르다. 더구나 냉연 도금재 시장은 이미 중국산 CGI에 최고 33.67%의 잠정덤핑방지관세가 부과된 뒤 가격 구조가 한 차례 바뀐 상태였다. 관세로 막힌 자리를 다른 공정의 제품이 파고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변화가 단순한 일시적 저가 물량인지, 시장의 제품 경계를 다시 긋는 변화인지 아직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싸게 사는 일, 오래 파는 일
오후 두 시의 의사결정 회의에는 구매, 영업, 품질, 생산, 재무가 모두 들어왔다. 박도현은 회의자료 첫 장에서 가격표를 빼버렸다. 대신 칠판에 세 문장만 적었다. ‘어디까지 대체 가능한가.’ ‘누가 승인하는가.’ ‘재고가 남으면 어디로 보낼 것인가.’
재무담당 정하린이 먼저 물었다.
“가격표가 없는 구매회의는 처음 봅니다.”
박도현이 웃었다.
“오늘은 가격을 몰라서 회의하는 게 아닙니다. 너무 잘 보여서 회의하는 겁니다.”
윤태수가 바로 반박했다.
“그래도 톤당 15만~20만원 차이면 고객에게 제안할 카드가 생깁니다. 특히 범용 강관 쪽은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생산반장 최민재가 말했다.
“라인에 넣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 다만 소재 편차가 어느 정도인지 더 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기존 냉연 소재와 같은 속도로 돌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생산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정하린이 물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확인 전에는 원가를 소재값만으로 계산하면 안 됩니다.”
이수경이 자료를 넘겼다.
“그리고 고객 승인 범위를 나눠야 합니다. 자동차 외판이나 고급 가전처럼 표면 품질과 정밀 성형이 중요한 영역까지 같은 제품으로 묶으면 안 됩니다. 반대로 강관 등 일부 용도는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면 검토할 수 있습니다.”
회의는 한동안 ‘살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로 옮겨갔다. 박도현이 원했던 방향이었다. 구매가격 하나로 결론을 내리면 누구나 쉽게 찬성할 수 있다. 하지만 판매 가능 범위, 생산성, 품질 승인, 재고 회전까지 한 줄에 놓으면 싼 가격의 의미가 달라진다.
윤태수가 다시 말했다.
“시장 가격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9월 둘째 주 냉연강판은 국산과 수입산이 각각 2만원씩, 아연도금강판은 각각 3만원씩 올랐습니다. 지금 신규 저가재를 확보하면 영업이 숨을 돌릴 수 있습니다.”
박도현이 되물었다.
“그 상승이 수요가 살아서입니까, 가격 정상화 움직임 때문입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수요 회복이라고 단정하지 못했다.
정하린이 계산기를 내려놓았다.
“재고가 빨리 돌면 가격 차이는 이익입니다. 안 돌면 그 차이는 그대로 금융비용과 평가손실 위험이 됩니다.”
그때 영업팀 휴대전화가 울렸다. 윤태수가 통화를 받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강관 고객 한 곳에서 얇은 도금재 견적을 다시 달라고 합니다. 가격이 맞으면 HGI도 검토할 수 있는데, 먼저 품질자료와 가공 테스트 결과를 달랍니다.”
박도현은 그 말에 펜을 들었다. 시장이 답을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졌다.
“좋습니다. 대량 선매입은 보류합니다.”
윤태수가 눈썹을 올렸다.
“지금 가격을 놓치자는 겁니까?”
“아닙니다. 가격은 잡되, 재고는 잡지 않겠습니다. 공급사에는 시험과 승인에 필요한 조건을 먼저 요구하고, 영업은 실제 적용 가능한 고객부터 확인하십시오. 품질팀은 용도별 승인 기준을 나누고, 생산팀은 라인 테스트에서 속도와 불량 가능성을 기록해주십시오.”
이수경이 물었다.
“승인이 끝나기 전에는 기존 승인재를 유지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싼 코일을 먼저 사서 고객을 찾는 순서를 뒤집겠습니다. 고객과 공정을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 코일을 사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기 직전, 생산반장 최민재는 회의실 문을 잡고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시험재가 들어오면 생산 일정에서 별도 구간을 잡겠습니다. 기존 소재와 섞어서 결과를 흐리게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영업도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가격만 앞세운 확정 제안을 하지 마십시오.”
윤태수가 웃으며 말했다.
“구매팀장이 영업의 싼 가격 카드를 빼앗아가는 날도 있군요.”
“빼앗는 게 아니라 순서를 바꾸는 겁니다. 이번 건은 가격표 다음에 품질을 보는 게 아니라, 품질 다음에 가격표를 봐야 합니다.”
정하린은 회의록 마지막 줄에 ‘재고 선확보 없음’이라고 적었다. 그 한 줄은 보수적인 결정처럼 보였지만, 누구도 시장을 포기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 냉연도금재와 HGI가 실제로 겹치는 용도를 구분해내면, 다음 구매에서는 가격 협상의 기준이 더 분명해질 수 있었다. 싼 수입재를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과, 쓸 수 있는 곳과 쓸 수 없는 곳을 나눠 계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대응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박도현은 입고장으로 다시 내려갔다. 아침에 보았던 샘플 코일은 아직 같은 자리에 있었다. 오전에는 그것이 톤당 15만~20만원의 기회처럼 보였다. 오후에는 다른 모습이었다. 관세가 붙지 않는다는 사실, 얇게 만들 수 있다는 기술, 빠르게 늘어나는 수입량은 분명 시장의 경계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구매팀이 돈을 버는 순간은 가장 싼 제품을 발견했을 때가 아니라, 그 제품을 어디에 팔 수 있는지 먼저 알아냈을 때였다.
그날 박도현은 계약서를 닫지 않았다. 대신 승인 절차를 열었다. 당장의 가격 이점을 일부 포기하는 대신, 재고가 고객보다 먼저 도착하는 일을 막기로 했다. 다음 주에 시험 결과가 나오면 구매조건은 다시 협상할 수 있다. 그때까지 샘플 코일은 창고 한쪽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싸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이지 않은 첫 번째 코일이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냉연강판(국산, 1mm SHEET 수도권 1차) | 96~98만원/톤 | +2만원 |
| 냉연강판(수입산, 1mm SHEET 수도권 1차) | 92~94만원/톤 | +2만원 |
| 아연도금강판(국산, 1.2mm SHEET 수도권 1차) | 112~114만원/톤 | +3만원 |
| 아연도금강판(수입산, 1.2mm SHEET 수도권 1차) | 107~109만원/톤 | +3만원 |
| 중국산 HGI 오퍼 | 600달러 중후반/톤 | 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