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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㊸ — 3만원의 시간차

강철의 계절 ㊸ — 3만원의 시간차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자 코일센터 영업기획팀장 서준의 메신저에 수입 열연 견적이 올라왔다. 국내산 열연강판 유통가격이 톤당 91만~93만원, 수입산은 88만~90만원. 시장이 말하는 차이는 대략 3만원이었다. 숫자만 보면 답은 간단했다. 더 싼 쪽을 사면 됐다. 그러나 서준은 견적서를 바로 고객에게 전달하지 않고 생산관리실로 내려갔다.


슬리팅 라인 앞에서 생산계획 담당 민아가 다음 가공 순서를 바꾸고 있었다. 전날까지 잡혀 있던 한 고객의 열연 가공 물량이 확정되지 않아 코일 투입 순서가 비어 있었다.

“그 고객 아직 발주 안 넣었습니까?”

“가격 다시 본답니다. 수입재로 바꾸면 소재 승인부터 확인해야 해서 오늘 안에는 결론이 안 날 것 같습니다.”

“그럼 라인을 비워둘 수는 없잖아요.”

“다른 주문을 앞으로 당길 수는 있습니다. 대신 오후에 다시 바꾸려면 셋업을 또 해야 합니다.”


서준은 손에 든 견적서를 접었다. 가격 차이는 3만원이었지만 공장 안에서는 그 차이가 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입재가 싸더라도 고객의 승인, 입고 일정, 가공 순서가 맞지 않으면 코일센터는 빈 시간을 떠안아야 했다. 반대로 국산을 고집하면 고객은 “왜 더 비싼 걸 사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 분명했다.


아홉 시 회의에서 재무팀 과장 유진은 더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가격을 맞춰주면 남는 게 있습니까?”

“수입재 하단까지 맞추면 어렵습니다.” 서준이 답했다.

“그럼 왜 협상합니까?”

“가격만 맞추는 협상은 안 하려고요.”


유진이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지금 국내산은 91에서 93, 수입산은 88에서 90입니다. 고객이 3만원만 보고 움직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할인뿐입니다.”

서준은 중국 천진항 열연코일 수출가격 자료를 가리켰다. SS400 3mm 기준 톤당 500~502달러 FOB, 전주보다 중심가격이 6달러 올랐고 5주 연속 상승해 누적 상승폭은 20달러였다.


“수입재가 오늘 싸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해외 가격이 계속 내려가는 국면도 아닙니다. 게다가 국내 제조사도 판매가격을 낮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고객한테는 무슨 의미죠?” 유진이 물었다.

“지금 3만원 차이를 전부 우리가 깎아줄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 고객이 그 3만원 때문에 부담하는 다른 비용을 줄여줘야 합니다.”


정오 무렵 서준은 고객사 구매책임자 현우와 화상통화를 연결했다. 현우는 인사말을 끝내자마자 가격표부터 화면에 띄웠다.

“수입재가 88에서 90인데 국산을 92에 사야 할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서준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 “92라는 숫자를 설명하기보다, 실제로 언제 쓰실 물량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가격 협상하자고 했는데 납기를 먼저 묻습니까?”

“네. 오늘 전량을 가져가실 게 아니면 구매가격과 재고비용을 같이 봐야 합니다.”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수입재로 바꾸면 3만원을 아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다만 수입재는 소재 승인과 입고 시점이 맞아야 합니다. 저희는 국산 재고를 가공 일정에 맞춰 나눠 출하할 수 있습니다. 필요 시점에 맞춰 받으면 귀사 창고에 먼저 쌓아둘 이유가 줄어듭니다.”


“결국 가격은 안 내리겠다는 얘기군요.”

“가격만 놓고는 수입재와 같은 선까지 내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출하 순서를 귀사 생산 일정에 맞추고, 확정되지 않은 물량은 먼저 가공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재고를 귀사 재고처럼 쓰되 실제 출하는 필요한 시점에 맞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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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구매부서가 보는 것은 매입 단가였지만, 생산부서는 소재가 너무 일찍 들어와 창고를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고 품질부서는 새로운 수입 소재를 쓸 때마다 서류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서준은 그 틈을 가격 인상 명분으로 쓰지 않았다. 오히려 3만원을 다른 방식으로 쪼개 보여주려 했다. 싸게 사는 것과 싸게 사용하는 것은 같은 계산이 아니었다.


통화를 끊은 유진은 거래처별 채권 현황을 띄웠다. 그는 가격표보다 먼저 결제 흐름을 봤다. 매출이 늘어도 대금 회수가 늦어지면 코일센터가 먼저 자금을 넣어야 했다. 특히 가격이 약한 장에서는 재고 평가손실과 채권 부담이 동시에 생길 수 있었다.


“분할 출하를 해주면 우리 쪽 재고가 더 오래 남습니다.”

“맞습니다.” 서준이 말했다. “대신 고객 때문에 가격을 낮춰 전부 밀어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재고가 오래 남는 것과 가격을 깎는 것, 어느 쪽이 더 싼지 계산해야 합니다.”


“그래서 확정되지 않은 가공은 하지 않겠습니다. 코일은 원형 상태로 두고 다른 주문으로 돌릴 수 있게 하죠. 고객 전용 재고로 묶어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유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을 방어한다는 말은 흔했지만, 실제로는 재고를 쌓아두고 버티다가 나중에 더 큰 할인으로 털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서준의 제안은 가격을 지키는 대신 재고의 용도를 고정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영업의 약속을 생산과 재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겠다는 의미였다.


통화가 끝난 뒤 생산관리실에서 민아가 물었다.

“결론 났어요?”

“오늘 필요한 가공분만 먼저 확정합니다. 나머지는 고객 생산계획 따라 순서를 열어두기로 했습니다.”

“그럼 라인 계획은요?”

“확정분만 잡고, 빈 시간은 다른 주문으로 채우세요. 고객 때문에 오후 순서를 통째로 비워두지는 맙시다.”


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산 쪽에서는 가장 듣고 싶었던 답이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발주를 기다리느라 설비를 세우지 않아도 됐다.

오후 두 시가 지나 현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조건 하나만 더 확인하죠. 수입재 가격이 더 내려가면 다음 물량은 다시 협상하는 겁니까?”

“그때 시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반대로 수입재가 오르더라도 오늘 확정한 물량 조건을 뒤집지는 않겠습니다.”

“국산 제조사가 가격을 내리면요?”


“그 변화도 다음 협상에 반영하겠습니다. 지금은 양쪽이 서로 미래 가격을 보장하자는 계약이 아니라, 오늘 필요한 물량과 시점을 확정하는 계약으로 가죠.”

현우가 웃었다. “3만원을 안 깎아주면서 3만원 이야기를 제일 오래 하네요.”

서준도 웃었다. “그 3만원이 어디서 생기는지 알아야 깎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날 협상에서 전 물량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영업팀이 기대한 만큼 매출이 한 번에 잡힌 것도 아니었다. 대신 코일센터는 시장 아래로 가격을 던지지 않았고, 고객은 필요하지 않은 재고를 미리 떠안지 않았다. 재무팀은 외상 한도를 불필요하게 늘리지 않았고 생산팀은 확정되지 않은 주문을 위해 설비 시간을 비워두지 않았다. 어느 한 부서도 완벽하게 만족하지 않았지만 각자가 떠안는 위험은 줄었다.


퇴근 무렵 서준은 아침의 두 견적서를 다시 펼쳤다. 국내산 91만~93만원, 수입산 88만~90만원. 종이 위에서는 세 줄이면 끝나는 차이였다. 그러나 그 차이 뒤에는 입고 시점, 가공 순서, 창고 공간, 승인 절차, 현금 회전이 붙어 있었다.


그는 중국 열연 수출가격이 5주째 올라 500~502달러 FOB까지 온 자료도 옆에 놓았다. 수입재의 현재 가격이 낮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계속 낮을 것이라는 판단은 다른 문제였다. 국내 제조사들이 가격을 낮추지 않는 가운데 4분기 주요 생산라인 정비까지 예정돼 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생기면 오늘의 3만원은 다음 달에는 전혀 다른 숫자가 될 수 있었다.


서준은 다음날 영업회의 자료 첫 줄에 가격 대신 문장을 하나 적었다. ‘싼 가격을 찾는 것과 싼 거래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이번 협상의 결론은 국산을 지킨 것도, 수입재를 밀어낸 것도 아니었다. 가격 차이를 시간과 재고와 신용으로 나눠 본 뒤, 어느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 다시 정한 것이었다.


그날 늦은 오후 슬리팅 라인은 멈추지 않았다. 고객의 추가 주문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준에게는 그것이 실패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 모든 물량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내일의 가격을 다시 협상할 여지가 남았고, 오늘 가격을 무너뜨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거래의 출발선도 지킬 수 있었다. 시장에서 3만원은 작지 않은 차이였다. 하지만 그 차이를 무조건 할인으로 메우지 않는 순간, 협상은 비로소 가격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내산 열연강판91만~93만원/톤보합
수입산 열연강판88만~90만원/톤1만원 하락
중국 천진항 열연코일500~502달러/톤 FOB중심가격 6달러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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