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메이커 인상, HGI 수입, 규격 미스매치가 한 견적서에서 충돌했다
2026년 9월 9일 수요일 | 안산 코일센터·조관사 구매회의·품질시험실
인상 공문과 할인 요청이 같은 시간에 왔다
수요일 오전 7시 50분, 서진코일센터 구매팀장 정하린의 메일함에 제조사 가격 인상 공문이 도착했다. 9월 주문분부터 냉연강판과 산세강판은 톤당 3만원, GI는 5만원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주력 조관사 고객에게서 GI 단가를 내려달라는 전화가 왔다. 9월 첫째 주 시장가격은 CR 95만원, PO 93만원, GI 110만원 안팎, HGI 106만원, EGI 107만원 수준으로 전주와 큰 변화가 없었다. 공문은 위를 가리켰고 시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영업팀 김우석이 말했다. “고객들은 메이커 인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수요가 없는데 왜 올리냐고 합니다.”
하린은 공문을 접었다. “우리가 제조사도 아니고 고객도 아니야. 중간에서 어느 가격으로 재고를 쌓을지만 정해야 해.”
생산반장 신광재가 창고 목록을 내밀었다. “GI 총재고는 괜찮은데 조관사에서 찾는 두께가 부족합니다.”
품질팀 이보람이 말했다. “HGI로 바꾸면 일부 용도는 가능할 수 있지만 고객 승인 확인이 먼저입니다.”
그날의 첫 사건은 가격이 아니라 규격이었다. 창고에는 코일이 있었지만 고객이 원하는 코일은 부족했다. 동시에 중국산 HGI 공급 확대 가능성이 시장의 새 변수로 떠오르고 있었다.
630달러보다 중요한 승인서
오전 10시 고객사 구매회의가 열렸다. 고객 구매부장은 중국산 HGI가 일부 GI를 대체할 수 있다는 시장 얘기를 꺼냈다.
“중국 HGI 물량이 늘어난다는데, 왜 우리가 GI 110을 그대로 받아야 합니까?”
우석이 답했다. “제품 대체는 가격표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고객이 되물었다. “결국 비싸게 팔겠다는 얘기 아닌가요?”
보람이 자료를 넘겼다. “현재 귀사 승인 품목은 GI입니다. HGI로 바꾸려면 가공성과 도금 특성 확인이 필요합니다. 시험 없이 바로 대체하면 납품 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린이 말했다. “대신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기존 GI는 계약조건 유지, 신규 HGI 후보는 시험물량으로 별도 진행하죠.”
고객이 팔짱을 꼈다. “시험기간 동안 단가 차이는 누가 부담합니까?”
우석이 답하려다 멈췄다. 하린이 대신 말했다. “시험물량 가공비는 저희가 일부 부담하겠습니다. 대신 정식 전환 전에는 기존 품질조건을 바꾸지 않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우석이 불만을 토했다. “우리가 왜 시험비까지 부담합니까?”
“지금 5만원 인상분을 바로 전가하는 것보다 대체 가능성을 우리 손으로 확인하는 게 싸기 때문이야.” 하린이 말했다.
재고표의 총량이 거짓말을 했다
오후 1시 생산라인에서 긴급 호출이 왔다. 고객 주문에 필요한 규격 GI가 전산상으로는 충분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폭과 두께가 대부분이었다. 광재가 바닥에 펼친 재고표를 가리켰다.
“총량은 500톤인데 지금 바로 쓸 수 있는 건 80톤입니다.”
하린이 물었다. “나머지는?”
“다른 규격이거나 이미 예약입니다.”
우석이 말했다. “그럼 인상이고 뭐고 납품부터 못 합니다.”
보람이 조용히 말했다. “오늘 부족한 규격을 HGI로 무리하게 대체하면 품질승인 문제까지 겹칩니다.”
그때 다른 고객이 납기를 일주일 미루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하린은 즉시 그 고객의 예약재 규격을 확인했다. 필요한 규격과 일부 겹쳤다. 전환점이었다.
“예약 순서를 바꾸고 첫 고객에게 먼저 공급하죠. 연기 요청한 고객은 다음 입고분을 배정합니다.”
광재가 물었다. “라인 셋업이 두 번 늘어납니다.”
“생산성 손실은 감수합시다.”
우석이 웃었다. “오늘은 영업이 아니라 구매가 고객을 살리네요.”
“아니, 재고가 우리를 살린 거야. 정확히는 재고를 제대로 본 게.”
인상분을 팔지 않고 선택권을 팔았다
오후 늦게 하린은 9월 매입계획을 수정했다. 메이커 인상분을 그대로 받아 재고를 늘리는 대신 필요한 GI 규격만 선별 매입하고, HGI는 고객 승인 가능성이 높은 규격부터 시험 계약을 검토하기로 했다. 가격을 쫓아 일괄 매입하지 않고 규격별 판매가능성을 기준으로 나눴다.
재무팀은 매입 축소로 매출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린은 답했다. “수요가 부족한데 5만원 오른 원가를 창고에 쌓으면 그게 가장 비싼 선택입니다.”
우석이 물었다. “그럼 고객에게 인상은 언제 반영합니까?”
“납기와 규격을 우리가 실제로 보장할 수 있을 때. 가격만 올리고 물건을 못 주면 인상은 정책이 아니라 불신이 됩니다.”
그날 회사는 긴급 물량을 맞추기 위해 추가 셋업비를 부담했고, HGI 시험물량의 일부 비용도 떠안기로 했다. 대신 GI 계약을 무리하게 할인하지 않았고, 메이커 인상분을 전량 재고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110만원짜리 GI와 106만원짜리 HGI 사이에는 단순한 4만원 차이보다 승인과 납기의 벽이 있었다.
밤이 되자 하린은 시험실 창문 너머로 샘플 코일을 봤다. 다음날 철근팀에서는 가격을 올리겠다는 제강사와 84만5천원까지 내려온 시장이 정면으로 부딪힐 예정이었다.
시험 코일 한 개가 부서의 기준을 바꿨다
오후 5시, 보람은 시험실에서 HGI 샘플의 가공조건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고객 승인 전이므로 실제 양산에 투입할 수는 없었지만, 회사는 향후 대체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내부 시험을 시작했다. 하린은 그 모습을 보며 수입재 확대를 단순한 가격 압박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입 HGI가 늘면 국내 GI 가격에 부담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고객에게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 문제는 그 선택지가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였다.
보람이 말했다. “샘플만 통과한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고객 라인에서 실제 가공성까지 봐야 합니다.”
우석이 답했다. “그럼 승인까지 몇 주 걸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무단 대체보다 낫죠.”
하린은 구매계획표에서 HGI 예상 물량 옆에 ‘승인 전’ 표시를 넣었다. 싸다고 해서 판매가능재고로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동시에 GI 재고는 총량이 아니라 두께·폭·메이커별로 쪼개 관리하도록 했다. 기존에는 500톤이라는 숫자가 안심을 줬지만, 아침에 실제 사용 가능한 물량이 80톤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그 숫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저녁 무렵 재무팀에서 인상분 반영률을 묻는 전화가 왔다. 메이커 원가가 올라가는데 판매가는 그대로면 마진이 줄어든다는 지적이었다. 하린은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모든 주문을 받지 않겠습니다. 회전이 느린 규격은 매입을 줄이고, 납기가 급해 가격을 인정하는 주문과 장기 거래처를 우선하겠습니다.”
재무담당이 되물었다. “매출 감소를 감수하겠다는 겁니까?”
“적자 재고를 늘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날 저녁 고객사에서 시험 HGI 물량을 소량 받아보겠다는 회신이 왔다. 우석은 당장 대량 계약으로 확대하고 싶어 했지만 하린은 막았다. “첫 시험 결과 나오기 전까지 확대하지 마세요. 수입이 늘어난다는 기사와 우리가 팔 수 있다는 건 다른 얘기입니다.”
광재는 생산계획표를 수정하면서 투덜거렸다. “이번 주는 자꾸 총량보다 세부 규격이 중요하다고 하네요.”
하린이 말했다. “하락장일수록 그래요. 안 팔리는 500톤보다 오늘 필요한 50톤이 더 비쌉니다.”
회사에는 당장 두 가지 비용이 생겼다. 추가 셋업과 시험 가공비였다. 그러나 반대로 무리한 고가 매입을 줄였고, 향후 HGI가 실제 대체재가 될 경우를 대비한 승인 경로를 확보했다. 메이커가 5만원을 올리겠다고 한 주에 하린이 얻은 결론은 아이러니했다. 가격 인상을 시장에 밀어 넣는 것보다 고객이 왜 그 가격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증명하는 일이 먼저였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냉연강판(CR) | 95만원/톤 | 전주와 동일 |
| 산세강판(PO) | 93만원/톤 | 전주와 동일 |
| GI | 110만원/톤 안팎 | 전주와 동일 |
| HGI | 106만원/톤 | 전주와 동일 |
| EGI | 107만원/톤 | 전주와 동일 |
※ 가격과 시장상황은 선택한 K스틸 2026-09-04 원자료 범위에서 사용했으며, 소설 속 기업·인물·거래조건·사내 판단은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