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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㉘ — 99만원의 빈칸

강철의 계절 ㉘ — 99만원의 빈칸

부제: 후판은 팔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 데나 팔 수 없는 물건이 됐다

2026년 9월 1일 화요일 | 서해중공업 자재팀·당진 후판 가공장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재고가 아니라 납기 불일치표


화요일 오전 8시 10분, 서해중공업 자재팀장 조현수가 받은 첫 보고는 재고량이 아니라 납기 불일치표였다. 국산 후판은 약 99만원/톤, 수입재는 약 96만원/톤으로 가격만 놓고 보면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프로젝트용 특정 두께와 폭은 재고가 얇았고, 일반 규격은 움직임이 둔했다. 전체 수요는 약한데 필요한 규격만 부족한 이상한 시장이었다.


가공장 쪽에서는 더 급한 전화가 왔다. 전력설비 프로젝트에 들어갈 후판 일부가 품질 승인 전 단계에서 멈춰 있었다. 고객은 납기를 당겨 달라고 요구했고, 영업은 계약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품질팀은 승인되지 않은 대체재를 쓸 수 없다고 버텼다.


“가격은 99로 맞출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목요일까지 절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업부 차장 정유림이 말했다.

품질팀 임성호가 서류철을 덮었다. “대체 규격은 화학성분표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냥 두께만 맞는다고 같은 후판이 아닙니다.”


현수가 물었다. “수입재 96은?”

“가격은 좋지만 승인서가 늦습니다.”


유림이 탁자를 두드렸다. “그러면 고객은 다른 데 갑니다.”

성호가 맞받았다. “승인 안 된 판을 보내고 클레임 나면 고객이 더 빨리 떠납니다.”


회의실 벽 한쪽에는 중국산 슬래브 수입통계가 붙어 있었다. 올해 1~7월 중국산 슬래브 30만3,489톤, 전년 동기 대비 76.4% 증가, 전체 슬래브 수입 중 중국산 비중 50.7%. 완제품 후판에 무역구제 조치가 들어간 뒤 반제품 쪽 조달이 늘어난 흐름이 숫자로 보였다. 9월 초 당진항 예정 슬래브 7만7,715톤 가운데 중국발 비중이 67.8%라는 자료도 있었다.


현수는 그 숫자가 당장의 프로젝트를 구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슬래브가 들어오는 것과 지금 창고에 원하는 후판이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프로젝트용 세 장


오전 10시, 그는 가공장으로 내려갔다. 절단기 옆에는 프로젝트용으로 예약된 후판과 일반 유통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창고관리 반장 박경호가 말했다.


“팀장님, 일반재는 공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규격은 세 장밖에 없습니다.”

“예약은?”

“두 장은 다른 고객이 잡았습니다.”

“그쪽 납기는?”

“다음 주입니다.”


현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물량을 빌립시다.”

박 반장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객 간 재고를 돌리겠다는 겁니까?”

“납기 순서를 바꾸는 거죠. 대신 다음 주 고객에게는 입고 확정분을 우선 배정하고 운송비는 우리가 부담합니다.”


미래 공급을 믿을 수 없는 오후


오후에 예상하지 못한 전환점이 생겼다. 항만 물류업체에서 예정 슬래브 일부의 하역 순서가 바뀔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입항 자체가 취소된 것은 아니지만, 국내 압연 일정이 밀릴 가능성이 있었다. 구매팀은 미래 공급을 믿고 현재 재고를 너무 얇게 운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구매담당 박채원은 말했다. “프로젝트 물량을 지키려면 일반재까지 줄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유림이 반발했다. “유통 거래를 끊으면 99만원 가격표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시장에서 사라지는 순간 고객도 우리를 빼요.”


현수가 물었다. “그럼 유통과 프로젝트 중 어느 쪽을 지킬 겁니까?”

유림은 잠시 침묵했다. “프로젝트를 우선하되, 유통 고객에게는 납기 확약을 줘야 합니다.”

성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품질 승인 없는 대체는 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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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는 결정을 내렸다. 프로젝트용 규격은 재고 우선순위를 최상위로 올리고, 일반 유통은 물량을 줄이는 대신 출하일을 확정해 제시하기로 했다. 99만원 가격을 무리하게 할인해 재고를 넓게 뿌리지 않았다. 대신 특정 규격을 원하는 고객에게는 납기 보증을 붙였다. 가격을 지키는 대신 공간과 시간을 배분한 셈이었다.


그날 오후 늦게 고객사에서 전화가 왔다.

“목요일 절단 가능합니까?”


현수가 답했다. “가능합니다. 다만 1차 물량부터 나갑니다. 잔량은 다음 주 초입니다.”

“단가는 그대로죠?”

“그대로입니다. 대신 납기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유림이 말했다. “99만원을 깎지 않고 계약을 지켰네요.”


현수는 고개를 저었다. “가격을 지킨 게 아니라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약속을 골랐습니다.”

대가는 있었다. 다음 주 납품 예정이던 다른 고객에게 운송비를 추가 부담해야 했고, 창고 재배치로 야간작업이 발생했다. 그러나 품질 승인 없는 대체재를 쓰지 않았고, 핵심 프로젝트 고객의 신뢰도 지켰다.


야간 절단기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판 한 장의 가격은 99만원이었지만, 그날 가장 비싼 것은 빈칸이었다. 재고표에 없는 규격, 납기표에 없는 하루, 그리고 한 번 잃으면 다시 사기 어려운 고객의 신뢰였다.


슬래브가 늘어도 오늘 쓸 후판은 아니다


오후 두 시 반, 구매담당 채원이 다시 회의실로 사람들을 불렀다. 중국산 슬래브 수입 증가 자료를 두고 생산팀이 “원재료 공급은 충분한 것 아니냐”고 말한 것이 발단이었다. 현수는 숫자 하나를 가리켰다. 중국산 슬래브 비중이 높아진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고객이 요구한 규격의 후판이 오늘 가공장에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슬래브는 압연을 거쳐야 하고, 후판은 다시 규격과 품질 승인을 맞춰야 합니다.” 성호가 말했다. “원재료가 많아졌다고 승인된 완제품 재고가 자동으로 늘어나는 건 아닙니다.”


채원이 덧붙였다. “게다가 전체 슬래브 수입은 줄었는데 중국산 비중만 커졌습니다. 조달선이 바뀐 것이지 공급 리스크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유림이 한숨을 쉬었다. “고객은 그런 설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목요일에 자재가 있느냐 없느냐만 묻습니다.”


현수는 화이트보드에 세 칸을 그렸다. ‘가격’, ‘승인’, ‘납기’. 그리고 가격 칸에 99만원, 승인 칸에는 ‘확인 완료’, 납기 칸에는 ‘목요일 1차’라고 적었다. “앞으로 프로젝트 후판은 이 세 칸이 다 채워져야 견적을 확정합니다. 단가만 적어서 계약을 잡지 맙시다.”


그날 처음으로 영업팀이 가격표 옆에 품질승인 상태를 붙였다. 품질팀은 승인된 대체규격 목록을 정리했고, 창고는 프로젝트 예약재와 일반 유통재의 위치를 분리했다. 구매팀은 예정 입항 슬래브를 ‘도착 예정’으로만 표시하고 실제 압연 가능일이 확정되기 전에는 판매 가능한 재고로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야간 절단기의 불빛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첫 출하 물량을 실을 운송차량 한 대가 다른 현장에서 지연됐다. 유림은 즉시 다른 차량을 찾자고 했지만 물류 담당자는 야간 배차비가 늘어난다고 난색을 보였다.


“계약 마진에서 운송비까지 빼면 남는 게 없습니다.” 물류 담당이 말했다.

현수가 물었다. “차량을 못 잡으면?”

“절단은 끝나도 목요일 오전 현장 반입이 위험합니다.”


성호가 조용히 말했다. “품질 승인까지 지켰는데 마지막 운송에서 약속을 깨면 앞의 과정이 다 의미 없어집니다.”

현수는 야간 배차비를 회사가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영업팀에는 다음 프로젝트부터 긴급 납기 요청에 별도의 운송 조건을 계약 단계에서 명확히 넣도록 했다. 유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99만원은 강판 가격이고, 우리가 떠안는 비용은 그 밖에 다 숨어 있네요.”

“그래서 싼 후판과 비싼 후판을 단가만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현수가 답했다.


밤 아홉 시, 첫 절단품이 포장되고 품질서류가 함께 묶였다. 가공장은 예정시간보다 늦게까지 불을 켰고 회사는 추가 운송비를 부담했다. 그러나 고객에게 보낸 확약일은 지킬 수 있게 됐다. 다음 주 유통물량 일부는 뒤로 밀렸지만, 회사는 그 고객에게도 새 출하일을 먼저 통보했다.


현수는 사무실로 돌아와 다음 주 재고회의 안건을 바꿨다. ‘후판 총재고’ 대신 ‘승인 완료·납기 확약 가능 재고’를 첫 줄에 넣었다. 전체 수요가 약한 시장에서도 특정 프로젝트용 재고가 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숫자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후판 시장의 99만원은 보합이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품질과 시간의 가격이 매일 달라지고 있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후판약 99만원/톤전주 수준 유지
수입 후판약 96만원/톤국산과 동반 보합
중국산 슬래브 1~7월30만3,489톤전년 동기 대비 +76.4%

※ 시장자료 기준. 소설 속 프로젝트·승인·재고 전환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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