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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㉙ — 0.8밀리의 경계선

강철의 계절 ㉙ — 0.8밀리의 경계선

부제: 수입이 줄었다고 안심한 순간, 더 얇은 HGI가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2026년 9월 2일 수요일 | 동하코일서비스 구매실·안산 가공라인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재고는 있는데 쓸 코일이 없다


수요일 오전 6시 55분, 동하코일서비스의 안산 가공라인이 멈췄다. 고장은 아니었다. 강관 고객이 요청한 규격의 GI 코일이 출고장에 없었다. 창고 전산에는 GI 재고가 충분하다고 나왔지만, 필요한 두께와 폭을 맞춰보니 사용할 수 있는 코일이 없었다. 공급 부족이 아니라 규격 미스매치였다.


냉연은 95만원, 산세강판은 93만원, GI는 110만원, HGI는 105~106만원, EGI는 107만원 수준이었다. 도금재 가격은 냉연보다 상대적으로 견조했지만, 현장에서는 ‘평균가격’보다 ‘오늘 가공 가능한 규격’이 더 중요했다.


생산반장 최광호가 구매팀장 한예린에게 말했다. “재고 600톤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총량이 그렇다는 거죠. 고객 규격으로 잡으면 다릅니다.”


영업사원 이정민이 끼어들었다. “고객은 오늘 오후에 샘플이라도 달랍니다. 못 주면 다음 달 물량 다시 본다고 합니다.”

광호가 손을 털며 말했다. “그러면 규격이 비슷한 HGI를 돌리면 안 됩니까?”


품질담당 문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승인 없이 바꾸면 안 됩니다. 도금량과 가공성이 다릅니다.”

예린은 태블릿에 중국산 HGI 오퍼를 띄웠다. 약 630달러 CFR, 0.8mm 수준까지 생산 가능. 중국산 GI 잠정 덤핑방지관세 이후 일반 GI 수입은 크게 줄었지만, 박물 HGI가 일부 GI 수요와 사용 영역을 겹치기 시작했다.


“수입이 줄었다고 가격이 자동으로 오르는 시장이 아닙니다.” 예린이 말했다. “문이 하나 닫히면 옆문이 열립니다.”

정민이 물었다. “그럼 630달러짜리 HGI를 잡자는 겁니까?”

“지금 당장 사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대체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죠.”


승인 없는 대체는 없다


오전 9시 반, 고객사와 화상회의가 열렸다. 고객 구매담당자는 단호했다.

“우리는 GI로 승인받았습니다. HGI로 바꾸려면 재시험이 필요합니다.”


서윤이 말했다. “샘플 테스트를 먼저 진행하면 승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험 기간 동안 생산은 누가 책임집니까?”


정민이 답했다. “현재 GI 재고에서 가능한 폭으로 먼저 일부 공급하고, 잔량은 가공 스케줄을 조정하겠습니다.”

고객이 되물었다. “가격은요?”


예린이 끼어들었다. “기존 계약가격을 유지하겠습니다. 다만 긴급 소량은 분할 출하로 대응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생산반장이 불만을 터뜨렸다. “분할 출하하면 라인 셋업이 늘어납니다. 생산성이 떨어져요.”


영업은 반대편에서 말했다. “고객을 놓치면 생산할 물량 자체가 없어집니다.”

품질은 또 다른 계산을 했다. “승인 없이 대체하면 단기 생산성은 좋아져도 클레임 비용이 훨씬 큽니다.”


세 부서는 같은 코일을 보고 서로 다른 손익을 계산하고 있었다.


한 고객의 연기가 다른 고객을 살리다


오후 1시, 전환점이 왔다. 다른 거래처에서 GI 주문 일부를 다음 주로 미루겠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그쪽도 판매가 늦어져 재고를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예린은 즉시 그 물량의 규격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아침에 부족했던 고객 규격과 상당 부분 겹쳤다.

“이 물량을 먼저 돌리면 오늘 샘플은 가능합니다.” 예린이 말했다.


광호가 물었다. “다음 주 고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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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은 납기를 늦춰달라고 먼저 요청했습니다.”


정민이 웃었다. “재고는 그대로인데 갑자기 부족이 사라졌네요.”

예린이 답했다. “그래서 총량만 보면 안 되는 겁니다.”


회사는 그날 두 가지 결정을 동시에 내렸다. 첫째, 고객 승인 없이 GI를 HGI로 임의 대체하지 않는다. 둘째, 중국산 HGI 0.8mm 박물 가능 규격은 시험 구매 후보로 올리고, 품질 승인 가능성과 도착 시점을 함께 검토한다.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수입계약을 먼저 하지 않고, 실제 대체 가능한 수요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저녁 6시, 가공라인이 다시 돌았다. 긴급 물량은 크지 않았지만 고객에게 약속한 샘플이 생산됐다. 대신 다음 주 작업계획은 다시 짜야 했고, 야간 셋업 비용이 발생했다. 영업팀은 마진 일부를 포기했고 생산팀은 효율을 포기했다. 품질팀은 승인 절차를 지켰다.


예린은 빈 코일 포장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장에서 진짜 경계선은 GI와 HGI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격과 규격, 납기와 품질, 재고총량과 사용가능재고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단가 몇 만원보다 훨씬 큰 비용이 생길 수 있었다.


총재고 600톤의 착시


오후 세 시, 예린은 창고 전산 담당과 함께 재고 분류방식을 다시 들여다봤다. 지금까지는 품목과 제조사, 두께 정도만으로 재고를 묶었지만 고객 승인 여부와 실제 가공 가능 폭을 넣고 나니 ‘사용 가능한 재고’가 전혀 다른 모양으로 보였다. 총량은 같아도 특정 고객에게 당장 쓸 수 있는 코일은 훨씬 적었다.


“그럼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낀 게 착각은 아니네요.” 정민이 말했다.

“총량 기준으로 보면 착각이고, 고객 규격 기준으로 보면 사실입니다.” 예린이 답했다.


생산반장 광호는 화면을 넘기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쪼개면 재고가 너무 복잡해집니다. 생산은 단순해야 효율이 나옵니다.”

품질담당 서윤이 말했다. “고객이 다르면 같은 GI라도 승인 이력이 다릅니다. 생산 편의 때문에 그 차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예린은 9~10월 공급계획이 평월 수준이라는 원자료 메모를 꺼냈다. 제조사 공급이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8월 유통 판매가 평월보다 20~30%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대목도 함께 표시했다. “공급이 부족해서 무조건 더 사야 하는 시장이 아닙니다. 판매가 줄었는데 특정 규격만 부족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정민이 물었다. “그럼 중국산 HGI 0.8mm는요?”

“시험은 하되 물량부터 잡지 않습니다. 승인 가능한 고객이 몇 곳인지 확인하고, 실제 대체수요가 있는 만큼만 검토합니다.”


한 코일을 사기 전에 세 부서가 서명하다


그날 오후 구매팀은 수입 검토 절차를 바꿨다. 예전에는 가격과 납기, 결제조건을 확인한 뒤 구매가 결재를 올렸지만 앞으로는 품질과 영업이 먼저 ‘대체 가능 고객’을 확인하도록 했다. 싼 오퍼가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재고를 늘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광호가 불만을 표시했다. “결재가 더 늦어지겠네요.”

예린이 말했다. “대신 들어온 뒤 안 팔리는 코일은 줄어듭니다.”


재무 담당 오대리는 또 다른 표를 들고 왔다. “지금 도금재는 평균가격이 버티고 있어도 판매회전이 느립니다. 수입재를 현금으로 결제하고 국내 고객에게 외상으로 팔면 가격 차이가 곧바로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정민이 웃으며 말했다. “결국 오늘도 가격보다 현금 얘기네요.”

“철강에서 가격은 늘 현금 얘기입니다.” 오대리가 답했다.


오후 다섯 시, 오전에 샘플을 요청했던 강관 고객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샘플 품질을 확인한 뒤 다음 물량은 기존 GI를 우선하되 HGI 대체시험도 병행하겠다는 답이었다. 정민은 더 싼 HGI를 당장 본계약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 대신 시험규격과 승인조건을 먼저 정리했다.


“매출을 늦추는 것 아닙니까?” 광호가 물었다.

예린은 가공라인 옆에 쌓인 코일을 바라봤다. “승인 안 된 재고를 사놓는 건 매출을 늦추는 게 아니라 현금을 묶는 겁니다.”


그날 회사는 재고관리표에 ‘고객 승인 가능’, ‘즉시 가공 가능’, ‘대체시험 필요’ 세 항목을 새로 만들었다. 영업은 고객별 납기를, 생산은 셋업 부담을, 품질은 승인 위험을 같은 화면에서 보게 됐다. 각 부서가 자기 숫자만 볼 때는 600톤이 충분해 보였지만, 함께 보자 실제로 쓸 수 있는 재고의 경계가 드러났다.


예린은 퇴근 직전 수입 검토표 첫 줄에 한 문장을 적었다. ‘싼 코일은 도착하는 순간 자산이 되지 않는다. 팔릴 규격과 승인된 용도가 있을 때 비로소 재고가 된다.’ 0.8mm라는 얇은 숫자는 그날 회사의 구매원칙을 두껍게 바꿔 놓았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냉연95만원/톤약세
산세강판93만원/톤약세
GI110만원/톤상대 견조
HGI105~106만원/톤보합~약세
EGI107만원/톤보합
중국산 HGI 오퍼약 630달러/톤 CFR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 시장자료 기준. 소설 속 고객 승인·시험구매·가공계획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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