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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㉟ — 84만원과 90일 사이

강철의 계절 ㉚ — 84만원과 90일 사이

부제: 1만원 내려간 시장에서 영업이 먼저 줄여야 했던 것은 가격이 아니었다

2026년 9월 3일 목요일 | 새한건재 여신관리실·경기 남부 철근 야적장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트럭 두 대가 사라진 아침


목요일 오전 7시 55분, 새한건재 철근 야적장에 들어와 있던 출하지시 두 건이 동시에 취소됐다. 공급이 끊긴 것이 아니었다. 건설현장 두 곳이 공정 조정을 이유로 납품을 다음 주로 미뤘다. 야적장에는 묶음이 그대로 남았고, 배차해 둔 차량만 빈 채 돌아갈 처지가 됐다.


그 주 철근 유통시세는 84~85만원/톤으로 전주보다 1만원 낮았다. 동국제강 고시는 87만원/톤으로 시장과의 격차가 좁아져 있었다. 가격은 현실에 가까워졌지만 주문은 따라오지 않았다. 8월 판매 목표는 47만2,000톤으로 7월 목표보다 16% 이상 줄어 있었고, 재고는 약 30만톤선에서 공급 조절로 관리되고 있었다. 숫자는 모두 시장이 이미 수요 공백을 인정하고 있다는 쪽을 가리켰다.


영업부장 배준호가 야적장 사무실로 들어오자 여신관리팀장 신미경이 취소된 출하지시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 물량, 다른 데로 바로 돌리실 겁니까?”

“문의는 있습니다. 대신 결제 90일을 요구합니다.”


미경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90일을 열면 매출은 생기고 현금은 사라집니다.”

물류팀 김태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 안에 일부라도 빼야 합니다. 다음 입고 동선이 꼬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가격이 1만원 내려갔는데 더 늦추면 다음 주에는 또 낮춰달라고 할 겁니다.”


미경이 거래처별 채권표를 밀었다. “가격이 내려갈수록 더 빨리 받아야 합니다. 재고평가 손실과 외상기간이 같이 늘어나면 두 번 맞습니다.”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철근 묶음이 비에 젖은 야적장 밖에서 지게차 경적이 짧게 울렸다.


84만원의 주문, 90일의 돈


오전 9시 반, 기존 대형 고객이 전화를 걸어왔다. 물량은 충분히 가져가겠지만 시장이 약한 만큼 84만원대에서 맞추고 결제기간도 늘려달라는 요구였다. 준호는 가격만 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주문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돈이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84만원대는 시장 안입니다.” 준호가 말했다. “대신 결제 90일은 어렵습니다.”

상대가 웃었다. “요즘 누가 현금으로 철근을 삽니까. 다른 데는 조건 열어줍니다.”


“물량을 나누겠습니다. 첫 물량은 단기결제, 잔량은 공정 확정 후 다시 잡죠.”

“그럼 우리 현장 계획을 귀사 자금사정에 맞추라는 겁니까?”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현장이 실제로 쓰는 시점에 맞추자는 겁니다. 지금 전량을 보내면 현장도 재고를 떠안고 저희는 채권을 떠안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태욱이 물었다. “놓친 겁니까?”


“아직은요.” 준호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부터 주문량과 출하량을 같은 숫자로 보지 맙시다.”

미경은 그 말에 바로 반응했다. “좋습니다. 출하는 회수 가능한 만큼만.”


그들은 고객별 한도를 다시 계산했다. 장기 외상 거래처는 신규 출하를 줄이고, 현금 또는 단기결제가 가능한 중소 유통상에는 소량을 빠르게 돌리기로 했다. 재고를 한 번에 밀어내는 것보다 여러 번 나눠 회전시키는 방식이었다.


가격보다 먼저 무너지는 수요


점심 무렵 회의실에는 건설지표가 올라왔다. 6월 누적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인허가 면적은 3,267만㎡로 전년 동기보다 7.9% 줄었다. 착공 면적은 6.3% 늘었지만 과거 수준과의 격차가 남아 있었다. 9월 성수기라는 달력만으로 물량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유였다.

구매담당 이수한이 말했다. “스크랩도 약세입니다. 원가가 내려가면 고객은 철근도 더 내려갈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준호가 물었다. “그럼 지금 팔아야 합니까, 기다려야 합니까?”

“원가만 보면 더 기다릴 이유가 없지만, 수요가 없으면 가격을 낮춰도 거래가 늘지 않습니다.” 수한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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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경이 손가락으로 표를 두드렸다. “그래서 할인보다 회수기간을 먼저 봐야 합니다. 1만원을 양보하고 90일을 주면 단가와 금융비용을 동시에 잃습니다.”

태욱은 야적장 배치도를 펼쳤다. “취소된 물량을 이번 주 안에 전부 빼려 하지 말고 규격별로 쪼개죠. 회전 빠른 규격부터 앞열로 옮기면 소량 출하를 늘릴 수 있습니다.”


준호는 영업팀에 전화를 돌렸다. “오늘부터 ‘몇 톤 팔았느냐’ 대신 ‘며칠 안에 돈이 들어오느냐’를 같이 보고해. 물량 큰 주문이라고 무조건 우선하지 마.”

한 영업사원이 반문했다. “그러면 월말 목표 못 맞춥니다.”

“목표는 매출액이지 미수금이 아니다. 회수 안 되면 목표를 맞춘 게 아니야.”


큰 고객을 일부러 놓아주는 결정

오후 두 시, 대형 고객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경쟁 유통사가 90일 조건을 받아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준호는 순간 흔들렸다. 오랫동안 유지한 거래처였고 월 매출 비중도 컸다. 영업부장으로서 고객이 떠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는 미경에게 물었다. “이번 한 번만 열고 다음 달부터 줄이면 안 됩니까?”


“이번 한 번이 다음 달의 기준이 됩니다.”

“거래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채권을 잃으면 거래도 같이 잃습니다.”


태욱이 조용히 말했다. “대형 고객 물량이 빠지면 야적장은 숨통이 트입니다. 그 공간으로 회전 빠른 거래를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준호는 고객에게 직접 전화했다.

“90일은 어렵습니다. 대신 45일 이내 결제로 줄이면 우선 배정하고 분할 운송까지 맞추겠습니다.”

상대가 차갑게 말했다. “다른 데는 90일 됩니다.”


“그러면 그쪽 물량을 먼저 쓰십시오. 급한 물량이 생기면 저희는 단기결제로 즉시 대응하겠습니다.”

“거래를 줄이자는 겁니까?”

준호는 야적장 창문 너머의 철근 묶음을 바라봤다. “거래를 오래 하자는 겁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영업회의 자료의 첫 장을 바꿨다. ‘판매목표’라는 제목을 지우고 ‘회수 가능한 매출’이라고 적었다. 그 순간 매출 일부를 경쟁사에 내주는 비용은 확정됐지만, 회사가 떠안을 90일짜리 채권도 함께 줄어들었다.


1만원보다 무거운 것


오후 네 시 반, 오전에 문의했던 소규모 건설자재상에서 현금결제 주문이 확정됐다. 물량은 대형 고객보다 적었지만 즉시 출하가 가능했다. 회사는 두 번 나눠 상차하면서 추가 운송비 일부를 부담하기로 했다.

태욱이 계산기를 두드리며 말했다. “운임만 보면 손해입니다.”

미경이 웃었다. “90일 외상보다 싸면 됩니다.”


준호도 웃었다. “이제 우리 회사에서 가장 비싼 단위는 톤이 아니라 날짜네요.”

해가 지기 전 첫 차량이 야적장을 빠져나갔다. 철근 유통가격은 84~85만원으로 내려와 있었고 다음 주 가격이 더 낮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회사가 그날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의 바닥이 아니라 출하와 회수의 순서였다.


준호는 마지막으로 고객 등급표를 저장했다. 현금·단기결제 거래처에는 재고 우선권을 주고, 장기 외상 거래처는 물량과 한도를 함께 줄였다. 가격을 1만원 내리는 것보다 90일을 줄이는 결정이 더 어려웠고, 그래서 더 중요했다. 철근 한 묶음의 무게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묶음에 붙은 시간의 무게가 달라진 하루였다.


고시 87만원이 만든 착시


오후 세 시가 지나자 영업팀 막내가 물었다. “고시가 87만원이면 유통 84~85만원은 이미 충분히 싸진 것 아닙니까?” 준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미경에게 시선을 보냈다.

미경이 말했다. “싸고 비싼 건 기준이 하나일 때 얘기입니다. 고시와 유통가격의 간격은 줄었지만 수요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격 차이가 좁아진다고 현장 발주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구매담당 수한도 거들었다. “스크랩 약세가 이어지면 시장은 다음 원가 인하를 먼저 기대합니다. 그 기대를 따라 할인하면 실제 원가가 내려오기 전에 판매가격부터 내려갈 수 있습니다.”

준호가 화이트보드에 ‘87’, ‘84~85’, ‘90일’을 차례로 적었다. “세 숫자 가운데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건 마지막 하나뿐일 수도 있겠군.”


그는 영업팀에 새 승인 기준을 통보했다. 시장가격 범위 안의 할인이라도 결제기간이 길어지면 별도 승인을 받도록 했다. 반대로 단기결제 고객에게는 가격을 더 깎지 않더라도 우선 출하와 규격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시장이 약할수록 단가를 낮추는 것만이 서비스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날 오후 신규 문의 중 하나는 가격을 더 내리는 대신 다음 주까지 물량을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준호는 보관 자체는 받아들였지만 출하 확정 시점을 정하고 결제조건을 분리했다. 재고를 고객 대신 무료로 쌓아두는 거래가 되지 않도록 선을 그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철근 유통시세84~85만원/톤주간 1만원 하락
동국제강 고시87만원/톤유통시세와 격차 축소
8월 판매 목표47만2,000톤7월 목표 대비 16% 이상 축소
재고약 30만톤공급 조절로 관리

※ 시장자료 기준. 소설 속 거래처·출하량·여신조건·배차비는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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