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완제품: 후판 | 공간: 거제 조선소 인근 자재창고, 수요일 새벽
새벽 다섯 시 반, 빈 칸이 먼저 보였다 새벽 5시 반, 최은서는 거제 조선소 인근 자재창고의 하역장을 먼저 돌았다. 야드에는 야간에 들어온 후판이 층층이 쌓여 있었지만, 그녀가 확인한 것은 강판의 수량보다 입고표의 빈 칸이었다. 프로젝트용 후판은 가격보다 순서가 중요했다. 한 장이 늦으면 블록 조립 공정이 멈추고, 공정이 멈추면 수천만원의 지체비용이 생긴다. 국내산 후판 가격이 톤당 99만원 안팎이라는 사실은 구매팀 모두가 알았지만, 오늘 회의의 핵심은 일본산 범용재를 승인 품목에 넣을 수 있느냐였다.
창고반장이 안전모를 벗어 들며 말했다. “국산 물량은 들어왔습니다. 문제는 다음 차수입니다.”
은서가 물었다. “확정 못 한 물량이 아직 남았죠?”
“예. 6주 뒤 투입분 중 일부가 비어 있습니다.”
은서는 입고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조선소는 6주 뒤 투입될 물량 중 일부를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국내 공급사는 납기를 지킬 수 있다고 했지만 프로젝트 규격이 몰리는 주에는 분할 납품이 필요했다. 일본산은 가격 경쟁력이 있었고 부산뿐 아니라 인천을 통한 물량도 늘고 있었다. 문제는 성적서와 용접 승인, 그리고 일정이었다. 싸게 사도 승인에 일주일이 더 걸리면 의미가 없었다.
가격을 묻지 않는 구매회의 아침 회의실에는 국내 공급사 영업팀과 일본산 트레이더가 마주 앉았다. 재무팀은 화상으로 들어왔다. 은서는 가격표를 화면에서 내려버리고 일정표를 띄웠다.
국내 공급사 영업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단가 협의부터 하시죠.”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단가보다 납기입니다. 핵심 블록 투입일을 맞출 수 있습니까?”
“분할이면 가능합니다.”
“분할 출하 조건을 계약서에 넣을 수 있습니까?”
상대가 잠시 망설였다. “출하 계획은 조정할 수 있지만, 납기 보증까지 문구로 넣는 건 내부 승인 사항입니다.”
은서가 일정표의 한 칸을 가리켰다. “이 칸이 비면 우리도 내부 승인을 못 받습니다.”
일본산 트레이더가 끼어들었다. “가격은 우리가 더 유리합니다.”
은서가 물었다. “시험성적서 사전 제출은요?”
“가능합니다.”
“용접 승인에 필요한 자료는 선적 전에 다 받을 수 있습니까?”
“확인해봐야 합니다.”
“클레임이 나면 국내에서 바로 처리할 창구가 있습니까?”
트레이더가 웃음을 거뒀다. “가격보다 서류를 더 많이 물으시네요.”
“프로젝트 후판은 창고에 도착한 날이 아니라 조립라인에 들어간 날 돈이 됩니다.”
회의실 뒤편에서 재무팀장이 메신저를 보냈다. ‘가장 싼 물량 비중을 늘리면 총 조달비가 낮아진다.’ 은서는 메시지를 읽고도 답하지 않았다. 구매자는 단가를 낮추는 사람으로 평가받기 쉽다. 하지만 조선 프로젝트에서는 납기 지연 한 번이 단가 절감액을 순식간에 지워버릴 수 있었다.
70 대 30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은서는 최종안을 꺼냈다. 핵심 블록 물량은 국산으로 잠그고, 승인 가능한 범용재 일부만 일본산으로 분산하는 70 대 30 구조였다.
재무팀장이 화상회의에서 바로 물었다. “왜 일본산 비중을 더 안 늘렸습니까?”
은서가 대답했다. “싼 물량이 아니라 확정 가능한 물량을 늘린 겁니다.”
“단가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승인 지연 일주일보다 큽니까?”
재무팀장은 답하지 않았다.
국내 공급사는 분할 출하 계획을 다시 제출하기로 했고, 일본산 트레이더는 시험성적서를 선적 전 공유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품질팀은 승인 가능한 규격만 따로 표시했다. 물류팀은 두 조달 경로가 같은 주에 겹치지 않도록 입고 순서를 다시 짰다.
은서는 화이트보드에 세 단어를 적었다. ‘가격, 승인, 일정.’ 그리고 가격을 맨 마지막으로 옮겼다. 그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내 공급사는 가격 인하 요구를 예상해왔고, 일본산 트레이더는 싼 가격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매자가 요구한 것은 서로 달랐다. 한쪽에는 납기 보증과 분할 출하, 다른 쪽에는 성적서와 클레임 처리 조건이었다.
설계변경 오후가 되자 예상하지 못한 메일이 도착했다. 한 조선 프로젝트의 설계변경 통지였다. 필요한 두께가 바뀌었다. 이미 발주한 물량의 일부를 다른 프로젝트로 돌려야 했다.
생산기술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이 규격은 그대로 쓰기 어렵습니다.”
은서가 물었다. “전환 가능한 프로젝트는?”
“검토해야 합니다. 바로 확정은 못 합니다.”
“창고에 묶어두면 안 됩니다. 다른 블록 투입분부터 찾아주세요.”
국내 공급사 영업팀장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변경분 때문에 다음 출하도 조정하셔야 합니까?”
은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침에는 납기 부족이 문제였고 오후에는 이미 확보한 물량의 용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공급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부족만이 아니었다. 너무 빨리 확정한 재고도 위험했다.
“다음 출하는 유지합니다. 대신 두께 변경분은 다른 프로젝트 전환 가능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추가 발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물량 확정이 늦어집니다.”
“늦는 게 낫습니다. 필요 없는 물량을 창고에 쌓는 것보다.”
일정표가 가격표를 이긴 날 저녁 무렵 은서는 다시 하역장에 내려갔다. 아침에 비어 있던 일정표 한 칸에는 국산 분할 출하 계획이 들어갔고, 일본산 범용재에는 승인 자료 제출 조건이 붙었다. 완벽한 조달계획은 아니었다. 대신 어느 한쪽이 지연돼도 전체 공정이 멈추지 않도록 길을 두 개로 만들어 놓았다.
재무팀장이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결국 가장 싼 조달은 아니군요.”
은서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럼 무엇을 산 겁니까?”
은서는 크레인이 후판을 옮기는 모습을 바라봤다. “빈 칸이 생기지 않을 확률을 샀습니다.”
그날의 결론은 단순했다. 후판은 무겁지만 의사결정은 더 무거웠다. 가격을 1만원 낮추는 것보다 한 주의 공정이 밀리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 더 큰 이익일 수 있었다. 은서는 다음 발주서 첫 줄에 단가 대신 투입일을 적었다. 공급망에서 가장 비싼 것은 철이 아니라 빈 일정표였다.
세 부서가 다시 계산한 같은 물량
설계변경 통지가 나온 뒤 구매·품질·물류팀은 같은 후판 물량을 다시 계산했다. 구매팀에게는 이미 잡아둔 조달량이었고, 품질팀에게는 승인 범위를 다시 확인해야 할 자재였으며, 물류팀에게는 창고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는 중량물이었다.
품질팀장이 말했다. “두께가 바뀐 물량은 다른 프로젝트로 넘길 수 있어도 성적서 연결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물류팀장이 물었다. “그 확인 전에 입고되면 어디에 둘까요?”
은서가 답했다. “입고를 서두르지 맙시다. 지금은 빨리 받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국내 공급사는 생산계획을 이미 짜두었다며 확정을 요구했다. 일본산 트레이더도 선적창구를 오래 열어둘 수 없다고 압박했다. 양쪽 모두 자기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은서가 관리해야 할 것은 공급사의 생산성도, 트레이더의 선복도 아니었다. 조선소의 조립순서와 현금이었다.
재무팀장이 다시 물었다. “추가 발주를 늦추면 나중에 가격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은서가 말했다. “그 위험은 인정합니다. 대신 오늘 필요 없는 재고를 사는 위험도 같이 봐야 합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은서는 조달표에 색을 세 가지로 나눴다. 확정, 조건부, 보류. 처음에는 전부 ‘구매예정’이던 물량이었다. 물량을 나누자 누구의 책임인지도 선명해졌다. 확정 물량은 납기를, 조건부 물량은 승인을, 보류 물량은 설계변경 결과를 기다리게 됐다.
그녀는 신입 구매담당자에게 말했다. “후판 구매는 싸게 사는 일 같지만 사실은 순서를 사는 일이야. 어느 자재가 먼저 와야 하는지 틀리면 창고가 꽉 차도 공정은 멈춘다.”
신입이 물었다. “그럼 오늘 잘 산 건 뭡니까?”
은서가 일정표를 접었다. “아직 안 사도 되는 물량을 안 산 것.”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후판 | 99만원/톤 | 0 |
※ 가격은 극중 인물의 의사결정을 설명하기 위한 시장 기준선으로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