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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㉘ — 530달러의 밤

강철의 계절㉘ — 530달러의 밤



해당 완제품: 열연 | 공간: 인천 남동공단, 월요일 밤

퇴근 버튼을 누르지 못한 밤

월요일 밤, 인천 남동공단 사무실의 형광등은 절반만 켜져 있었다. 이준호는 퇴근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화면 한쪽에는 베트남산과 인도네시아산 열연 오퍼가 나란히 떠 있었다. 톤당 530달러와 535달러. 그 숫자는 싸다는 뜻이 아니라, 창고에 누워 있는 2천 톤의 국산 열연이 오늘보다 내일 더 비싸 보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회사는 지난달 제조사 인상분을 반영해 재고를 채웠고 평균 원가는 쉽게 낮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고객들은 이미 환율이 내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화가 올 때마다 첫 질문은 품질이 아니라 “이번 주 더 내려오느냐”였다.

영업팀장 윤세훈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준호가 모니터를 가리켰다. “530이 또 왔습니다.”

“계약하죠. 더 늦으면 남들이 먼저 잡습니다.”

“지금 필요한 게 더 싼 재고입니까?”

“수입 원가가 내려가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준호는 대답 대신 창고 재고표를 띄웠다. 2천 톤. 숫자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하루 사이에 달라지고 있었다.


판매량과 현금의 충돌

낮 회의에서 영업팀은 월말 출하 목표가 남았다며 판매량을 채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래처 세 곳의 외상 한도는 이미 80%를 넘었다. 재무팀장은 낮은 가격에 더 팔면 매출채권만 커진다고 반박했다.


재무팀장 박수연이 말했다. “판매는 늘어도 현금이 안 들어오면 창고 재고가 매출채권으로 형태만 바뀌는 겁니다.”

윤세훈이 바로 받았다. “그래도 출하를 안 하면 재고가 그대로 남습니다.”

“90일 뒤 받을 돈과 오늘 받을 돈을 같은 매출로 보면 안 됩니다.”

준호가 물었다. “60일 어음을 30일 현금으로 바꾸면?”

“톤당 1만원 정도 양보할 여지는 있습니다.”

“90일이면?”

“오히려 가격을 올려야 합니다.”

회의가 끝난 뒤 준호는 가격표 옆에 결제일을 적기 시작했다. 얼마에 팔았는지보다 언제 돈이 돌아오는지가 중요해졌다. 수입재 오퍼가 싸질수록 기존 재고의 가격 경쟁력은 떨어졌고, 재고 회전이 늦어질수록 금융비용은 쌓였다.


600톤 전화

밤 10시가 지나 오래 거래해 온 구조관 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열연 600톤 필요합니다.” 준호가 물었다. “결제는요?” “45일. 가격은 93만원 맞춰주세요.”


준호는 오전 회의가 떠올랐다. 회사 내부 기준은 95만원을 지키자는 쪽이었다. 그러나 창고 회전이 멈추면 다음 주 금융비용이 더 커진다. 그렇다고 600톤 전부를 93만원에 내보내면 그 가격이 다음 거래의 기준이 될 수 있었다.

“300톤은 30일 현금으로 갑시다.”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나머지는요?”

“다음 달 첫째 주 출하. 결제조건도 따로 보겠습니다.”

“가격을 한 번에 못 맞춰준다는 얘기네요.”

“물량을 한 번에 못 파는 게 아니라 위험을 한 번에 못 떠안는 겁니다.”

상대가 웃었다. “요즘 철강 장사보다 금융업 하시는 것 같습니다.”

준호도 웃지 않았다. “요즘은 돈이 돌아와야 철강 장사가 끝납니다.”

잠시 뒤 거래처가 답했다. “그럼 첫 300톤은 바로 가져가죠.”

통화가 끝나자 준호는 메모장에 ‘300톤—30일 현금’이라고 적었다. 할인 대신 결제조건을 나눠 손실을 통제한 첫 거래였다.


530달러를 닫다

윤세훈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수입재는 계약해야 하지 않습니까?” 준호는 530달러 오퍼 메일을 열었다. 싼 수입재를 지금 계약할지, 국산 재고를 먼저 줄일지 결정해야 했다. 수입재를 잡으면 미래 원가는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물량이 도착하기 전까지 현재 창고의 고가 재고는 더 오래 남는다.


“오늘 계약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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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인데요?”

“530이라서 안 합니다.”

윤세훈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싸게 사면 좋은 거 아닙니까?”

“지금 더 사면 우리 창고의 2천 톤이 더 비싸집니다.”

준호는 수입 계약서를 닫았다. 오늘 필요한 것은 더 싼 물건이 아니라 창고에 있는 물건을 돈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의 흔들림

다음 날 아침, 중국산 열연 통관량이 늘고 있다는 보고가 도착했다. 준호는 메일 제목만 보고도 전날 결정을 다시 의심했다. 수입재가 더 많이 들어오면 시장가격은 추가 압력을 받을 수 있었다. 어제 530달러를 잡지 않은 선택이 며칠 뒤 비싸게 보일 수도 있었다.


재무팀장 박수연이 커피를 들고 그의 책상 앞에 섰다. “후회됩니까?”

“조금요.”

“가격이 더 내려갈 것 같아서요?”

“도착 시점이 빨라질까 봐요.”

“그럼 어제 거래는 틀렸습니까?”

준호는 300톤 출고 지시서를 바라봤다. “아니요. 적어도 300톤은 재고에서 현금으로 바뀝니다.”

그날 준호는 새 원칙을 적었다. ‘매입가격보다 현금회수일을 먼저 본다.’ 시장은 530달러와 535달러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장부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는 30일이었다. 다음 회차의 문은 가격이 아니라 도착일에서 열릴 것 같았다.


창고에서 본 숫자의 얼굴


다음 날 오전 준호는 사무실보다 먼저 창고로 갔다. 열연 코일 표면에는 입고월과 규격을 표시한 태그가 붙어 있었다. 같은 95만원의 판매기준을 적용해도 코일마다 매입원가와 보관기간이 달랐다.

창고팀장이 말했다. “오래된 규격부터 빼야 합니다. 여기 물량은 문의가 뜸합니다.”


준호가 물었다. “할인하면 나갑니까?”

“가격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고객이 필요한 폭이 다릅니다.”

준호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했다. 영업회의에서 ‘재고 2천 톤’이라고 부르던 숫자는 실제로는 수십 개의 규격과 서로 다른 매입시점, 서로 다른 판매가능성의 합이었다. 총량만 줄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빨리 현금화할 수 있는 규격과 오래 묶일 규격을 나눠야 했다.


그는 영업팀에 지시했다. “오늘부터 견적서에 결제조건만 쓰지 말고 재고연령도 같이 봅시다.”

윤세훈이 물었다. “고객한테 재고연령을 공개하자는 겁니까?”

“아니. 우리가 할인 판단할 때 쓰자는 겁니다. 오래된 재고를 30일 현금으로 내보낼 수 있으면 1만원은 비용일 수도 있고 절감일 수도 있어.”


재무팀장 박수연은 그 말을 듣고 자금표를 열었다. “그 기준이면 할인 한도를 일괄로 잡으면 안 되겠네요.”

“맞습니다. 같은 95만원 재고라도 30일 뒤의 가치가 다릅니다.”


오후에는 다른 거래처가 60일 결제를 조건으로 소량 문의를 해왔다. 준호는 가격을 바로 낮추지 않았다. 대신 출하 시점을 늦춰 재고와 현금흐름을 맞추는 조건을 제시했다. 거래는 즉시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는 더 이상 ‘판매 실패’로 보지 않았다. 손실이 되는 거래를 미룬 것도 하나의 결정이었다.

530달러 오퍼는 여전히 메일함 맨 위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 메일보다 창고의 오래된 태그를 더 오래 봤다. 미래의 싼 원가보다 현재의 비싼 재고를 현금으로 바꾸는 속도가 먼저였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열연95만원/톤-1만원

※ 가격은 극중 인물의 의사결정을 설명하기 위한 시장 기준선으로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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