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완제품: 철근 | 공간: 서울 동부 건설자재 유통사, 금요일 오전
가격이 내려갈수록 신용표를 먼저 보는 사람
금요일 오전 8시, 서울 동부의 건설자재 유통사. 한도윤은 시세표보다 거래처 신용등급표를 먼저 펼쳤다. 철근 가격이 내려간 주에는 영업사원들이 매출을 늘리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도윤은 반대로 봤다. 가격이 떨어질 때는 거래처의 자금사정도 같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건설현장의 기성이 늦어지면 자재대금도 늦어진다. 제품이 팔려도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유통사는 먼저 쓰러진다.
영업팀장 오진석이 회의실 문을 열며 말했다. “대형 거래처에서 1천 톤 들어왔습니다.”
도윤이 물었다. “결제는?”
“90일 어음입니다.”
“현장 기성은 확인했습니까?”
“물량부터 잡아야 합니다. 경쟁사도 보고 있습니다.”
시장은 톤당 85만~86만원. 제강사는 다음 주 고시가격을 87만원으로 낮추겠다고 했다. 과거 같으면 ‘바닥이 확인됐다’는 말이 돌 법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제강사 재고는 30만톤에 가까웠고 판매 진도율은 낮았다. 가격표는 내려왔지만 현장의 자금 사정이 좋아졌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1천 톤을 두 개로 쪼개다
오진석이 주문서를 밀어놓았다. “마진은 나옵니다.” 도윤이 물었다. “90일 뒤에도요?” “그건 어느 거래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닙니다. 가격이 내려가는 시장에서는 재고 손실과 미수 위험이 같이 옵니다.”
도윤은 주문을 두 개로 쪼갰다. 신용한도 안에서 400톤만 승인하고 나머지 600톤은 현장 기성 확인 뒤 출하하기로 했다.
오진석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하면 경쟁사에 600톤 뺏깁니다.”
“뺏길 수 있습니다.”
“1천 톤 주문을 400톤으로 줄이는 게 영업입니까?”
도윤은 서랍에서 지난달 부도 난 업체의 미수금 장부를 꺼냈다.
“이 업체도 처음엔 큰 주문이었습니다.”
오진석이 장부를 보지 않았다.
도윤이 말했다. “톤당 만원 마진을 남겨도 90일 뒤 못 받으면 0원이 아닙니다. 마이너스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영업팀은 매출을 잃는다고 생각했고, 도윤은 손실 가능성을 줄인다고 생각했다. 같은 주문서를 보고도 서로 다른 숫자를 보고 있었다.
84만원대 소문
오후가 되자 경쟁사가 84만원대 견적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영업팀 메신저가 바빠졌다. 누군가는 가격을 맞춰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제강사 고시가격 87만원이 나오면 시장이 다시 정리될 것이라고 했다.
오진석이 다시 도윤을 찾아왔다. “84가 사실이면 우리 85~86도 비싸 보입니다.”
“조건은?”
“그건 모릅니다.”
“결제기간도 모르고 운송 포함인지도 모르는데 숫자 하나만 보고 따라갈 겁니까?”
“시장에서는 숫자가 먼저 돕니다.”
“부도도 숫자보다 늦게 돕니다.”
도윤은 가격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운송비를 분리하고 현금 결제분에만 할인 폭을 열었다. 90일 어음 물량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거래처 구매담당자가 전화를 걸었다. “다른 데는 더 싸게 준다는데요.”
도윤이 말했다. “현금 결제분은 다시 보겠습니다.”
“90일은요?”
“그 가격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물량이 줄 수 있습니다.”
“400톤 먼저 받으시고 현장 기성 확인되면 다음 물량 협의하시죠.”
상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400톤을 먼저 받기로 했다.
안전하게 파는 법
출고팀은 400톤 물량을 배차하기 시작했다. 오진석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매출 600톤을 놓쳤네요.” 도윤이 답했다. “아직 놓친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못 받을 수도 있는 600톤을 아직 안 판 겁니다.”
도윤은 현장 기성 확인표를 영업팀과 공유했다. 거래처의 신용등급, 결제조건, 현장 진행 상황을 한 화면에 놓았다. 가격이 내려가는 시장에서 영업의 기준도 달라져야 했다. 많이 파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회수되는 만큼 파는 것.
87만원보다 먼저 확인할 것
해가 질 무렵 제강사에서 9월 재인상 가능성이 거론된다는 메일이 왔다. 오진석이 웃으며 말했다. “봐요. 87이 바닥일 수도 있다니까요.” 도윤은 웃지 않았다. “오를 수도 있죠.” “그럼 지금 더 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가격이 오르기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뭡니까?” “8월 말 재고하고 거래처 현금.”
그는 메일 창을 닫고 미수금 장부를 다시 열었다. 철근 가격이 다시 오르면 오늘 400톤만 승인한 결정이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격이 오르는 것과 돈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도윤은 다음 주 회의자료 제목을 바꿨다. ‘판매확대계획’이 아니라 ‘회수조건별 판매계획.’ 87만원은 시장의 기준이 될 수 있었지만 회사의 생존 기준은 아니었다. 그의 기준은 여전히 하나였다. 팔린 철근이 언제 현금으로 돌아오는가.
신용한도는 영업을 막는 벽이 아니었다
400톤 출고가 확정된 뒤 도윤은 영업사원들을 다시 불렀다. 불만이 남은 채로 다음 거래를 맡기면 같은 충돌이 반복될 것 같았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가격, 신용, 기성, 결제’ 네 단어를 적었다.
오진석이 말했다. “현장에서는 결국 가격으로 비교합니다.”
도윤이 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격으로 팔고 신용으로 살아남습니다.”
“신용한도를 너무 보수적으로 잡으면 성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400톤을 막은 게 아니라 승인한 겁니다. 600톤은 기성 확인이라는 조건을 붙였고요.”
한 영업사원이 물었다. “기성이 확인되면 바로 나갑니까?”
“현금 흐름이 확인되면요. 그때는 가격이 조금 달라도 거래할 이유가 있습니다.”
도윤은 지난달 부도업체 장부를 보여줬다. 매출은 분명히 잡혀 있었지만 회수되지 않은 순간부터 그 숫자는 실적이 아니라 부담이 됐다. 미수금은 시간이 지나며 이자와 관리비, 대손위험을 붙였다.
그는 말했다. “가격이 내려간 주에 가장 위험한 착시는 싸게 많이 팔 수 있다는 겁니다. 고객도 같은 생각으로 물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설현장 기성이 늦으면 그 물량은 우리 돈으로 현장을 운영해주는 셈이 됩니다.”
오진석이 장부를 덮었다. “그럼 앞으로 대형 주문은 전부 쪼갭니까?”
“아닙니다. 신용이 확인되면 한 번에 갑니다. 조건이 불확실하면 나눕니다.”
영업팀은 그날부터 견적 요청을 받을 때 가격과 수량만 적지 않고 결제수단과 현장 기성 상태를 함께 기록했다. 처음에는 번거롭다는 반응이 나왔지만, 몇 건의 문의를 같은 표에 놓자 거래의 위험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84만원대 소문도 여전히 돌았다. 그러나 도윤은 숫자 하나를 따라가는 대신 조건을 비교했다. 현금이면 할인, 외상이면 신용한도 안에서 분할. 그의 판매전략은 싸게 파는 법이 아니라 안전하게 팔고 다시 살 수 있는 돈을 남기는 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철근 | 85~86만원/톤 | 0~약보합 |
※ 가격은 극중 인물의 의사결정을 설명하기 위한 시장 기준선으로만 사용했다.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