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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⑳ — 꺼진 전기로의 주문서

강철의 계절⑳ — 꺼진 전기로의 주문서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2026년 8월 20일 · 국내 철근시장 모티프

차가운 전기로 앞에서

목요일 아침, 동해제강 영업팀의 메신저에는 “철근 1,600톤 발주 확정”이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올라왔다. 그러나 같은 시각 공장 쪽에서는 전혀 다른 알림이 들어왔다. 정비팀이 전기로 재가동 승인을 보류했다는 내용이었다. 주문서는 도착했는데 불은 아직 꺼져 있었다.

강도윤은 제강동으로 내려갔다. 정비가 끝나지 않은 설비 주변에는 공구함이 열려 있었고, 바닥에는 교체 부품 포장지가 남아 있었다. 8월 가동계획은 이미 52.4% 수준으로 낮아져 있었다. 영업은 휴가철 뒤 첫 대형 주문이라며 서둘렀지만, 생산은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부터 원료와 인력, 창고와 현금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안에 재가동 결재를 올려주셔야 합니다.” 영업팀장 서진우가 말했다.

“주문가격은요?” 도윤이 물었다.

“유통시세 수준입니다. 톤당 85만~86만 원. 물량이 크니 거래처를 잡아두는 게 먼저입니다.”

“고시가격은 91만 원대인데, 이 가격으로 신규 생산하면 남는 게 있습니까?”

진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문서 첫 장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번 한 건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휴가 끝나고 시장이 다시 열리면 다음 물량이 붙습니다.”

도윤은 정비팀장 오현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켤 수 있습니까?”

현석은 안전모 끈을 고쳐 매며 말했다. “켤 수 있는 것과 켜도 되는 것은 다릅니다. 베어링 작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루 앞당기면 정비 품질을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영업팀장이 낮게 말했다. “하루 때문에 1,600톤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현석이 되물었다. “그 1,600톤이 오늘 다 필요한 물량입니까?”

회의는 그 질문에서 멈췄다. 주문량은 분명했지만 사용 시점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주문량과 필요한 물량은 달랐다

오전 회의실에는 영업, 생산, 원료, 자금 담당자가 다시 모였다. 전국 철근 재고는 약 29만 톤이라는 숫자가 시장에서 돌고 있었다. 공급이 빠듯해질 수 있다는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도윤은 화면 한쪽에 전국 재고를 띄워놓고, 다른 쪽에는 자기 공장의 규격별 재고표를 열었다.

“시장 재고가 낮다고 우리 창고에 필요한 규격이 있는 건 아닙니다.” 도윤이 말했다. “10mm는 당장 출하할 수 있지만 13mm는 부족합니다.”

원료팀장 백성호가 스크랩 입고표를 넘겼다. “일본산 계약가격은 내려왔습니다. 다만 다음 달 도착분입니다. 오늘 야드에 넣을 물량은 아닙니다.”

진우가 말했다. “원가가 내려가는 방향이면 지금 생산을 잡는 게 맞지 않습니까?”

성호가 고개를 저었다. “가격 방향하고 입고 시점은 다릅니다. 국내 스크랩 입고도 폭염과 휴가 영향으로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전기로를 켠 다음 ‘값싼 원료가 오고 있다’고 말해봐야 배합표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자금팀장 윤혜진은 주문서의 결제조건을 표시했다. “생산부터 먼저 늘리면 매출채권도 같이 늘어납니다. 첫 출하분 대금이 확인되기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물량까지 생산하는 구조는 승인하기 어렵습니다.”

진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면 영업은 뭘 약속하라는 겁니까? 고객은 가격이 오르기 전에 1,600톤을 잡으려 합니다.”

혜진이 대답했다. “가격 약속과 생산 약속을 같은 것으로 만들지 말자는 겁니다.”

도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주문서를 넘겼다. 그때까지 회의는 ‘전기로를 켤 것인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질문을 바꿨다. “현장에 실제로 언제, 어느 규격이 들어갑니까?”

아무도 즉답하지 못했다. 도윤은 주문서를 접었다. “현장부터 보겠습니다. 오늘은 재가동 결재를 보류합니다.”

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보류하는 사이 다른 유통업체가 들어오면요?”

“그때 잃는 게 주문인지, 손실인지부터 구분해야 합니다.”

야적장 B구역의 반전

점심 무렵 도윤과 진우는 물류센터 공사현장에 도착했다. 구매팀은 1,600톤 전량을 한 번에 확보하려 했다. 철근 가격이 다시 올라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판단이었다. 그러나 현장소장은 철근보다 먼저 야적장 지도를 펼쳤다.

“전량을 어디에 쌓으시려고 합니까?” 현장소장이 물었다.

구매팀장이 B구역을 가리켰다. “여기 쓰면 됩니다.”

현장소장이 바로 선을 그었다. “다음 주부터 기초장비가 들어옵니다. 이 구역은 비워야 합니다.”

진우가 물었다. “그럼 필요한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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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mm가 먼저입니다. 13mm는 뒤입니다. 공정이 밀리면 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구매팀장이 불편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우리는 가격을 고정하려고 전량 발주한 겁니다. 분할하면 그 사이 가격이 오를 수 있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가격 기준은 전체 물량으로 협의하겠습니다. 대신 생산과 납품은 공정에 맞춰 나누겠습니다. 첫 물량은 기존 재고에서 10mm 500톤을 보내고, 13mm 500톤은 정비 완료 뒤 첫 압연 로트로 잡겠습니다. 나머지 600톤은 현장 진도와 첫 대금 입금 확인 뒤 확정하겠습니다.”

구매팀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우리는 1,600톤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1,600톤 가격 조건을 협의하는 겁니다. 하지만 필요하지 않은 날에 철근을 쌓아두지는 않겠습니다.”

“그 사이 다른 업체가 더 싸게 주겠다고 하면요?”

진우가 도윤을 바라봤다. 영업이라면 당장 가격을 맞추겠다고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도윤은 현장소장의 공정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첫 500톤을 검수한 뒤 판단하십시오. 저희도 그 대금이 약속대로 들어오는지 확인하겠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우가 말했다. “고객 앞에서 대금 이야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깨집니다.”

도윤은 창밖의 철근 가공장을 보며 답했다. “대금 이야기를 못 하는 거래라면 생산 이야기부터 하면 안 됩니다.”

더 낮은 오퍼가 들어오다

첫 500톤은 전기로를 켜지 않고 기존 재고에서 출하했다. 출하장은 바빴지만 제강동은 여전히 조용했다. 영업팀은 매출이 작다고 불평했고, 정비팀은 예정대로 작업을 끝냈다. 자금팀은 첫 출하분이 실제 현금으로 돌아오는 시점을 기다렸다.

그때 경쟁 유통업체가 같은 현장에 더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연락이 왔다. 구매팀은 잔량을 돌릴 수 있다고 압박했다. 영업팀 회의실에서는 즉시 가격 대응 이야기가 나왔다.

진우가 말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첫 500톤만 납품하고 끝날 수 있습니다.”

혜진이 물었다. “경쟁 가격에 맞추면 두 번째 물량의 현금회수 조건도 그대로입니까?”

“그건 다시 협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격만 내려가고 위험은 그대로 남습니다.”

도윤은 전화기를 들었다. 구매팀장이 연결되자 그는 짧게 말했다. “가격 재협의보다 첫 500톤 검수와 대금 조건을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상대가 말했다. “시장 점유율에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손실을 생산해서 점유율을 지키지는 않겠습니다.”

전화가 끝난 뒤 방 안이 잠잠해졌다. 진우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정비가 끝난 전기로를 바로 켜면 생산량은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문이 줄거나 현장 일정이 밀리면 그 생산량은 곧 재고가 된다. 이날의 전환점은 더 낮은 경쟁가격이 아니라, 가격을 따라가지 않기로 한 결정이었다.

생산하지 않은 물량의 값

며칠 뒤 현장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첫 물량의 가공은 예상보다 빨랐지만 기초공정 일부가 설계변경으로 멈췄다. 13mm 투입 시점은 오히려 뒤로 밀렸다. 전량을 미리 생산했다면 공장 창고나 현장 야적장 어딘가에 철근이 쌓였을 상황이었다.

정비 완료 뒤 전기로는 다시 켜졌다. 두 번째 물량인 13mm 500톤이 첫 압연 로트로 생산됐다. 첫 납품대금도 약속한 날 확인됐다. 생산팀은 그제야 다음 배합을 확정했고, 자금팀은 두 번째 출하 승인을 냈다.

그리고 마지막 연락이 왔다. 설계변경으로 철근 소요량이 줄어 잔량 600톤이 400톤으로 축소됐다는 통보였다.

진우가 생산회의에서 말했다. “결국 수주 200톤을 잃었습니다.”

도윤은 가동률표 옆에 현금회수표를 띄웠다. “아닙니다. 팔리지 않을 가능성이 생긴 200톤을 만들지 않은 겁니다.”

“그래도 생산량은 줄었습니다.”

“가동률을 채우려고 재고를 만들면 공장은 바빠 보여도 현금은 더 늦게 돌아옵니다.”

원료팀장 성호가 새 입고표를 들고 들어왔다. “국내 스크랩 입고가 예상보다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 배합을 다시 짜야 합니다.”

도윤은 잠시 전기로 쪽을 바라봤다. 불은 다시 켜져 있었지만, 이제 그 불은 주문서 한 장 때문에 켜지는 불이 아니었다. 그는 잔량 400톤의 생산 승인을 현장 진도 확인 뒤로 미루고, 원료 배합과 현금회수 조건을 함께 붙여 다시 결재선에 올리라고 지시했다.

결정의 대가는 분명했다. 영업은 당장 확보할 수 있었던 매출 일부를 놓쳤고, 생산은 가동률을 더 끌어올릴 기회를 포기했다. 대신 창고에는 팔 곳이 정해지지 않은 200톤이 생기지 않았다. 도윤은 그 빈 공간을 오래 바라봤다.

꺼진 전기로는 주문을 기다렸지만, 켜진 전기로가 이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생산량은 불이 만들고, 현금은 계약조건이 만들었다. 다음 주의 문제는 스크랩이었다. 불을 켤 수 있는 원료와, 켜도 되는 주문이 다시 같은 날 만나야 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철근85만~86만 원/톤전주 대비 1만 원 하락

주: 가격은 작품의 의사결정 배경으로만 사용했으며, 시장 모티프 자료의 범위를 넘어선 외부 수치를 추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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