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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㉔ — 도금의 회전일수



공청회에서 오간 말은 하루 만에 창고의 이자와 영업사원의 할인폭으로 바뀌었다.

2026년 8월 19일 수요일 | 청람철강




잠긴 출하와 열린 공청회 자료

오전 7시 51분, 냉연도금팀장 최유진이 출입카드를 찍기도 전에 창고관리자 윤정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날 출하하기로 했던 용융아연도금강판 물량이 아직 창고 안에 있다는 보고였다. 고객이 주문을 취소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달 초까지 반입을 늦춰달라는 요청이었다.


“자리만 차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윤정호의 뒤로 코일을 옮기는 크레인 경고음이 들렸다. “그 규격이 출하돼야 뒤쪽 장기재고를 앞으로 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새 물량과 오래된 물량이 서로 막고 있습니다.”


최유진은 사무실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받은편지함 맨 위에는 반덤핑 공청회 자료가, 그 아래에는 재무팀의 재고연령 경고 메일이 있었다. 국제 통상과 창고의 적치 순서가 한 화면에 나란히 놓였다.


잠시 뒤 영업사원 민재호가 견적서를 들고 들어왔다. “건설자재 고객이 GI 60톤을 보겠답니다. 대신 시세보다 톤당 1만 원 낮춰야 오늘 발주하겠다고 합니다.”

최유진은 견적서보다 먼저 물었다. “어느 생산일자 물량이지?”


민재호가 멈칫했다. “새로 들어온 쪽으로 잡았습니다. 표면 상태가 좋아서 고객 불만이 적을 겁니다.”

“오래된 재고는 또 뒤로 밀리겠네.” 최유진은 견적서를 돌려주었다. “가격부터 말하지 말고 재고연령표를 가져와.”


가격표보다 무거운 52일

오전 8시 30분 회의실 화면에는 가격표 대신 코일별 입고일이 떴다. GI 일부 규격의 회전일수는 이미 52일을 넘겼고, 다른 묶음은 60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냉연강판은 95만~96만 원, GI는 108만~109만 원, HGI와 EGI는 105만 원 안팎이었다. 숫자는 보합처럼 보였지만 창고 안에서는 시간이 매일 가격을 깎고 있었다.


재무팀 김서연 차장이 노트북을 회의실 중앙으로 밀었다. “판매가격이 그대로라고 손실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재고가 하루 더 머물면 금융비용도 하루 더 붙습니다. 60톤을 할인해서 팔지 말지만 결정할 게 아니라, 어떤 60톤을 며칠 만에 현금으로 바꿀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민재호가 반박했다. “오래된 재고를 내보냈다가 표면 문제라도 생기면 반품 위험이 있습니다. 영업은 매출만 만드는 부서가 아니라 클레임도 떠안습니다.”


윤정호가 코일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검수 결과를 먼저 보십시오. 포장 손상은 없고 출하 가능 판정입니다.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품질이 나쁜 건 아닙니다.”


구매팀 박지훈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문제는 다음 매입입니다. 정책 방향이 불확실한데 생산업체가 출하조건을 바꾸면 지금 가격이 그대로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창고가 안 비면 우리는 새 조건을 받아낼 여지도 없습니다.”


민재호가 최유진을 바라봤다. “그러면 1만 원을 깎아서라도 60톤 전량을 오래된 재고로 내보내자는 겁니까?”

최유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영업은 가격을 걱정했고, 재무는 회수기간을, 창고는 공간을, 구매는 다음 계약을 걱정했다. 같은 코일이 부서마다 다른 위험으로 보였다.


“전량도 아니고, 새 물량도 아니다.” 최유진이 회전일수 60일에 가까운 행을 표시했다. “오래된 재고 30톤만 조건부로 내보낸다. 나머지 30톤은 정상가격에 가까운 주문을 기다린다. 대신 결제일은 당긴다.”


김서연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민재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고객이 60톤 전량 아니면 거래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그 고객이 사려는 게 정말 60톤인지, 싼 가격 60톤인지 확인해야지.”


정책이 재고로 내려오는 길

오전 10시가 지나자 회의 주제는 반덤핑 공청회로 옮겨갔다. 화면에는 중국산 아연·아연합금 표면처리 냉간압연제품을 둘러싼 양측 주장이 정리돼 있었다. 신청인 측은 중국산 평균 수입가격이 2021년 톤당 1,002달러에서 2025년 638달러로 낮아졌고, 최근 월 수입량이 15만 톤 안팎까지 늘었다고 주장했다. 반대편은 덤핑과 국내 산업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정했다.


박지훈이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판정이 어느 쪽으로 나든 기다리는 동안 거래가 먼저 얼어붙을 수 있습니다. 고객은 관세가 붙을지 확인하겠다며 구매를 미루고, 수입상은 결과 전에 물량을 당기려 할 수 있습니다.”


최유진이 화이트보드에 열연, 냉연, 도금을 차례로 적었다. “도금강판에서 열연 원가 비중이 60~70%다. 원료 쪽 무역구제로 비용이 오르고 완제품 수입은 낮은 가격으로 들어오면 재압연사는 가운데서 눌린다. 그 압박은 결국 우리 매입조건이나 할인정책으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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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연이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재고를 줄이는 게 맞습니까, 가격 상승에 대비해 들고 가는 게 맞습니까?”

“정책을 맞히려고 재고를 쌓으면 안 됩니다.” 최유진이 말했다. “판정은 우리가 정할 수 없지만 회전일수는 우리가 줄일 수 있습니다.”


민재호가 팔짱을 풀었다. “그럼 고객에게 정책 위험을 설명하고 30톤만 제안하겠습니다. 다만 정상가격 물량 30톤을 추가로 묶어달라는 조건은 어떻습니까?”

김서연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싼 재고를 미끼로 새 재고까지 외상으로 묶으면 회수위험만 커집니다. 가격을 섞지 말고 계약도 나누세요.”


최유진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견적서를 반으로 접었다. “30톤은 오래된 재고, 짧은 결제. 나머지 30톤은 별도 견적. 오늘의 원칙이다.”


일본에서 닫힌 문이 국내 창고를 밀었다

점심 직후 해외영업팀에서 긴급 메일이 도착했다. 일본이 한국·중국산 GI에 잠정 반덤핑관세를 적용했고 열연·냉연 조사도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청람철강이 직접 수출하는 물량은 아니었지만, 생산업체의 수출길이 좁아지면 그 물량이 국내로 방향을 틀 수 있었다.


박지훈이 화면을 가리켰다. “국내에서는 중국산과 싸우고, 일본에서는 한국산이 장벽을 만납니다. 생산업체가 내수 출하를 늘리면 유통 재고는 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민재호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가격을 지키라는 겁니까, 빨리 팔라는 겁니까? 오전에는 할인하지 말라더니 오후에는 물량이 돌아올 수 있다고 합니다.”

최유진은 그의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모든 재고에 같은 답을 쓰지 말자는 거야. 오래된 재고는 시간을 팔고, 새 재고는 가격을 지킨다. 수출길이 좁아져 물량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구분 없이 쌓아둔 창고다.”


윤정호가 무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려면 위치부터 바꿔야 합니다. 60일 가까운 코일을 출하구 쪽으로 옮기고 새 물량은 안쪽으로 넣겠습니다. 오늘 작업이 늦어집니다.”


“늦어져도 하세요.” 최유진이 답했다. “창고 배치가 가격정책이 되는 날도 있습니다.”


60톤 주문의 진짜 조건

오후 3시 26분, 민재호가 고객사 구매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유진과 김서연은 스피커폰 옆에서 말없이 메모했다.

“요청하신 할인은 30톤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해당 물량은 검수를 마친 장기재고이고, 결제조건은 기존보다 짧게 부탁드립니다. 나머지 30톤은 별도 가격으로 제안하겠습니다.”


상대는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60톤을 한 번에 사겠다는데 왜 물량을 쪼갭니까? 다른 곳은 전량 조건을 맞출 수 있다고 합니다.”

민재호는 평소라면 즉시 가격을 더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고연령표를 바라봤다. “전량 할인의 기준이 시장가격입니까, 아니면 오래된 재고가격입니까? 저희는 두 물량의 원가와 입고시점이 달라 같은 조건으로 묶을 수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상대는 30톤만 먼저 받고 나머지는 현장 사용일정이 확정된 뒤 다시 협의하겠다고 했다. 애초부터 당장 필요한 물량은 60톤 전부가 아니었던 셈이었다.


통화가 끝나자 민재호가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우리가 60톤을 다 깎아줬으면 고객 창고를 대신 채워줄 뻔했습니다.”

김서연이 결제조건을 확인하며 답했다. “그리고 그 재고의 이자까지 우리가 냈겠지요.”


최유진은 승인 버튼을 눌렀다. 장기재고 30톤은 낮은 가격으로 나가지만 현금회수는 빨라졌다. 나머지 새 재고 30톤은 지켰다. 판매량은 줄었지만 손실의 범위도 줄었다.


가격을 지키는 데 드는 하루

해가 기울 무렵 최유진은 윤정호와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 조명 아래 코일 라벨의 생산일자와 입고일이 작은 글씨로 이어졌다. 도금층은 빛났지만 그 아래 묶인 자금은 보이지 않았다. 크레인이 60일에 가까운 재고를 출하구 쪽으로 옮길 때마다 바닥이 짧게 울렸다.


윤정호가 물었다. “내일부터도 오래된 것부터 무조건 빼면 됩니까?”

“무조건은 아닙니다. 품질과 고객 용도, 결제조건을 같이 봐야 합니다. 다만 새 물량이 편하다는 이유로 오래된 것을 뒤에 숨기지는 맙시다.”


사무실로 돌아온 최유진은 회의록 마지막 줄에 ‘정책 결과 확인 전 신규 매입 보수적 운영’이라고 적었다. 잠시 생각한 뒤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60일 초과 재고 우선 소진, 할인은 재고연령과 회수조건을 함께 승인.’


그때 박지훈에게서 새 매입조건 검토 요청이 도착했다. 생산업체가 다음 주 출하 배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공청회 판정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최유진은 다음 날 첫 회의 안건을 ‘가격표’가 아니라 ‘입고 중단 규격’으로 바꿨다. 관세의 벽은 먼 곳에서 세워졌지만, 청람철강이 먼저 부딪힌 것은 창고 안에 쌓인 시간이었다.



그날의 가격

※ 가격은 극중 의사결정의 배경이 되는 시장 기준선만 반영했다. 

품목가격주간 변동
냉연강판(CR)95~96만 원/톤보합
용융아연도금강판(GI)108~109만 원/톤보합
HGI105만 원/톤보합
EGI105만 원/톤보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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