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는 중국산의 문을 좁혔지만, 바다는 일본산을 싣고 다른 문을 열었다.

인천항에서 걸려온 전화
오전 7시 42분, 청람철강 후판팀장 이승민의 휴대전화가 회의실 책상 위에서 세 번 울렸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팀원들의 빈 의자 사이로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인천항 인근 보세창고를 관리하는 물류팀 장경수 과장이었다.
“부장님, 일본산 범용재 물량이 인천 쪽으로 잡혔습니다. 부산에서 돌던 물건과 같은 계통으로 보입니다.”
이승민은 블라인드를 올리다 손을 멈췄다. “입항이 확정된 건가?”
“선박 일정은 다시 봐야 하지만, 창고 자리 문의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남부권에서 끝날 물량이 아닐 것 같습니다.”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영업사원 정우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날까지 톤당 100만 원을 놓고 협상하던 프로젝트 고객이 오전 열 시까지 최종 가격을 달라고 했다. 요구가격은 98만5천 원, 수량은 180톤, 결제는 90일이었다. 수입재가 아직 하역되지도 않았는데 고객은 이미 그 물량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고 있었다.
이승민은 회의실 화이트보드를 세로로 갈랐다. 왼쪽에는 ‘유통 99만 원’, 오른쪽에는 ‘조선 상반기 171만5천 톤’이라고 적었다. 같은 후판을 두고 한쪽은 가격이 밀렸고 다른 쪽은 물량이 살아 있었다. 그 사이에 작은 글씨로 ‘인천항’이라고 쓰자, 그 단어가 두 시장을 잇는 화살표처럼 보였다.
99만 원과 90일의 싸움
오전 8시 20분, 영업·구매·재무·물류 담당자가 모두 모였다. 정우진은 고객의 견적요청서를 화면에 띄우자마자 말을 꺼냈다.
“180톤을 놓치면 이번 달 후판 출하 목표가 비어 보입니다. 98만5천 원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재무팀 김서연 차장이 서류철을 덮었다. “가격만 보고 잡을 물량이 아닙니다. 90일 결제면 창고에서 나간 뒤에도 석 달 동안 우리 돈이 아닙니다. 그 고객은 기존 매출채권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정우진이 의자를 앞으로 당겼다. “안 팔면 재고금융비용은 안 듭니까? 지금 창고에 있는 40일 넘은 규격부터 보면 답이 나옵니다.”
구매팀 박지훈 과장이 일본산 오퍼 화면을 확대했다. “일본산 SS400 범용재가 620달러 안팎입니다. 중국산은 660달러 수준이고요. 중국산에 무역장벽이 생겨 국산 공간이 넓어진 건 맞지만, 620달러가 인천으로 들어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오늘 99를 거절해도 다음 주 98이 올 수 있습니다.”
김서연이 즉시 받아쳤다. “그 620달러에 환율, 운임, 하역, 금융비용, 품질 대응까지 다 넣었습니까? 오퍼 숫자 하나로 90일짜리 외상을 정당화하지 마세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프로젝터 팬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이승민은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영업은 재고가 늙는 속도를 보고 있었고, 재무는 돈이 돌아오는 속도를 보고 있었다. 구매는 바다 건너 미래가격을 보고 있었다.
“가격과 수량, 결제를 한꺼번에 양보하지 않는다.” 이승민이 화이트보드에 세 줄을 그었다. “99만 원에 100톤만 우선 공급한다. 나머지 80톤은 다음 주 다시 협의한다. 결제조건을 줄이지 못하면 담보나 분할결제를 받는다.”
정우진의 표정이 굳었다. “고객이 전량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요?”
“그럼 180톤 매출을 버리는 게 아니라, 90일 뒤에도 돈이 될지 모르는 180톤을 거절하는 거다.”
고객은 가격보다 시간을 샀다
오전 9시 37분, 정우진은 스피커폰으로 고객사 구매담당자와 통화했다. 이승민과 김서연은 맞은편에 앉아 메모지만 바라봤다.
“99만 원에 100톤 먼저 공급하고, 잔량은 다음 주 시세를 보고 협의하겠습니다. 대신 결제는 기존 90일보다 당겨주셔야 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 들렸다. “일본산이 96만 원대까지 보이는데 국산 99만 원을 왜 사야 합니까? 우리는 180톤 전량이 필요합니다.”
정우진이 대답하려 하자 김서연이 메모지에 ‘납기’를 크게 썼다. 그는 문장을 바꿨다. “수입재가 언제 귀사 절단라인에 들어오는지는 확정됐습니까? 저희 물량은 지정 규격 100톤을 이번 주 안에 맞출 수 있습니다.”
상대가 잠시 말을 멈췄다. 가격을 밀어붙이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망설임이 묻어났다. “이번 주 100톤이 확실하다면 99만 원은 검토하겠습니다. 하지만 결제조건은 90일을 유지해야 합니다.”
김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승민은 손바닥을 펴서 정우진의 말을 막은 뒤 직접 입을 열었다. “90일을 유지하려면 두 번 분할 출하하고 첫 물량의 일부는 선결제로 받겠습니다. 가격을 양보한 만큼 회수조건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통화는 결론 없이 끝났다. 정우진은 스피커폰의 종료 버튼을 누른 뒤 낮게 말했다. “오늘 안에 답이 없으면 경쟁사로 갑니다.”
김서연은 노트북을 닫지 않은 채 그를 봤다. “경쟁사로 가는 매출이 전부 손실은 아닙니다. 회수되지 않는 매출을 가져오는 게 더 큰 손실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단단해졌다. 이승민은 화이트보드의 ‘99만 원’ 아래에 ‘100톤’과 ‘회수조건’을 나란히 적었다. 가격은 한 줄이었지만 계약은 세 줄이었다.
지도 위에서 바뀐 경쟁자
점심 무렵 박지훈이 수입통계를 들고 다시 들어왔다. 7월 일본산 중후판 수입은 8만5천 톤을 넘어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중국산은 반덤핑 조치의 영향으로 위축됐지만 조선 보세물량을 중심으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산이 비운 자리를 국산이 모두 차지할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틀어지고 있었다.
“부산에서만 돌 때는 남부권 가격으로 봤습니다.” 박지훈이 지도 화면에서 인천항을 가리켰다. “인천으로 올라오면 수도권 하치장들이 바로 비교견적을 냅니다. 경쟁자가 중국산에서 일본산으로 바뀐 게 아니라, 경쟁의 출발점이 항구에서 창고 옆으로 옮겨온 겁니다.”
장경수 과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전모를 벗자 이마에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창고 쪽도 결정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국산 정품 재고 가운데 장기 체류 규격을 앞쪽으로 옮기려면 오늘 오후 작업계획을 바꿔야 합니다.”
정우진이 물었다. “그 규격을 99만 원에 내보내면 얼마나 비울 수 있습니까?”
“100톤이면 한 칸이 비지만, 새로 들어올 물량까지 생각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180톤을 한 번에 빼면 다음 주 출하 대응이 어려워집니다.”
영업은 많이 팔고 싶었고, 창고는 오래된 것을 먼저 빼고 싶었으며, 구매는 낮아질지 모르는 미래가격 앞에서 신규 매입을 늦추고 싶었다. 같은 180톤이 부서마다 다른 물건이었다.
이승민은 창고로 내려갔다. 천장크레인이 후판 묶음을 들어 올릴 때마다 쇠사슬이 짧게 울었다. 국산 정품 옆의 수입재에는 다른 색 라벨이 붙어 있었다. 겉모습은 비슷했지만 라벨 안에는 관세, 환율, 리드타임, 품질인증, 결제조건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시장이 말하는 가격차는 그 복잡한 차이를 한 줄로 눌러쓴 숫자였다.
두 번째 전화가 판을 바꿨다
오후 3시 18분, 조선소 협력 가공업체에서 긴급 문의가 들어왔다. 범용재가 아니라 규격과 납기가 까다로운 물량이었다. 단가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결제기간이 짧고, 이번 주 안에 절단·출하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었다. 정우진은 아침의 프로젝트 물량을 먼저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향은 작업 손실까지 따지면 마진이 생각보다 얇을 수 있습니다. 지금 180톤 계약부터 닫아야 합니다.”
장경수가 바로 반박했다. “작업은 맞출 수 있습니다. 대신 오늘 저녁 적치 순서를 바꿔야 하고, 범용재 출하는 100톤 이상 잡으면 동선이 꼬입니다.”
김서연은 결제조건표를 밀어놓았다. “조선향은 회수가 빠릅니다. 단가가 조금 낮아도 현금흐름까지 보면 비교가 달라집니다.”
박지훈이 조용히 덧붙였다. “범용재는 다음 배가 들어오면 가격이 다시 눌릴 수 있습니다. 까다로운 규격은 항구의 620달러와 바로 같은 선에서 경쟁하지 않습니다.”
이승민은 아침에 그어놓은 화이트보드의 세로선을 바라봤다. 유통과 조선은 서로 다른 시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같은 창고 공간과 같은 현금을 두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는 결재란에 서명했다. 조선향 긴급 물량을 우선 배정하고, 프로젝트 물량은 99만 원에 100톤만 승인하되 분할결제 조건을 붙였다. 잔여 80톤은 확정하지 않았다.
정우진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180톤을 전부 가져갈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갑니까?”
“오늘 필요한 건 최대 매출이 아니라, 다음 선박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계약이다.” 이승민은 펜을 내려놓았다. “가격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조건은 지켜야 한다.”
항로가 남긴 청구서
오후 5시가 넘어 고객사에서 답이 왔다. 100톤 우선 공급과 분할결제를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잔여 80톤은 일본산 도착 일정을 확인한 뒤 결정하겠다고 했다. 계약은 성사됐지만 승리라고 부르기에는 반쪽이었다. 정우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김서연은 첫 입금 예정일을 확인한 뒤에야 서류를 승인했다.
창고에서는 조선향 후판을 앞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크레인 경고음 사이로 장경수의 무전이 이어졌다. 국산 정품 100톤은 프로젝트 고객에게, 까다로운 규격은 조선소 협력업체로 향했다. 남겨둔 80톤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본산 오퍼와 다음 주의 가격이 보이지 않는 재고처럼 놓여 있었다.
퇴근 직전 박지훈의 화면에 새 메시지가 떴다. 인천항 창고 문의 물량이 하나 더 늘었다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이승민에게 건넸다.
이승민은 그 문장을 읽고 아침에 적어둔 ‘인천항’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쳤다. 중국산을 막은 관세는 시장을 닫지 않았다. 대신 물량의 국적과 항구, 결제조건을 바꿨다. 그는 다음 날 회의 제목을 ‘가격 점검’에서 ‘항로별 재고위험’으로 고쳤다. 620달러의 후판은 아직 청람철강 창고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미 회사의 판매량과 여신, 작업순서까지 바꾸고 있었다.
그날의 가격
※ 가격은 극중 의사결정의 배경이 되는 시장 기준선만 반영했다. 자료: 시장.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후판 SS400 | 99만 원/톤 | 약 1만 원 하락 |
| 수입 후판 | 96만 원/톤 안팎 | 보합 |
| 일본산 범용재 오퍼 | 620달러/톤 안팎 | 경쟁력 부각 |
| 중국산 오퍼 | 660달러/톤 안팎 | MIP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