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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⑭ — 배정표 밖의 후판


높은 가격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청람철강의 출하장에 후판을 실은 화물차 두 대가 멈춰 있었다.

운전기사들은 시동을 끄지 않았다. 에어컨 실외기가 뜨거운 공기를 내뿜었고, 적재함 위에 놓인 두꺼운 후판에서는 한낮의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출하 승인만 떨어지면 곧바로 수도권 물류센터 건설현장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김민철은 출고전표에 서명하지 않았다.

“입금은 확인됐습니다.”

자금관리팀장이 말했다.

“전액 현금입니다.”

“보낸 회사는?”

“대명산업개발입니다. 주문서를 낸 세원구조와는 다른 회사입니다.”

“두 회사의 관계는?”

“세원구조 측에서는 시행사 관계회사라고 설명했습니다.”


김민철은 모니터에 띄워진 계좌내역을 바라봤다.

문제는 입금액이 아니었다.

돈을 보낸 대명산업개발의 대표가 아크트레이솔루션 회생 신청 직전까지 그 회사의 사내이사로 등재돼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크트레이솔루션과 거래하던 회사가 이름을 바꿔 다시 물량을 확보하려는 것인지, 회생절차에 들어간 회사의 자금이 외부로 빠져나온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차량은 대기시키십시오.”

영업팀장이 고개를 들었다.

“상무님, 이미 돈을 받았습니다.”

“돈을 받았다고 거래가 끝난 것은 아니야.”

“출고를 늦추면 위약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입금자와 계약자가 다르고, 물건을 받는 현장도 다르다. 세 회사의 관계부터 확인해야 한다.”


밖에서는 화물차 경적이 짧게 울렸다.

기사들에게도 다음 배차가 있었다. 출고가 한 시간 늦어질 때마다 운송사의 일정과 수입이 함께 흔들렸다.

철강재는 움직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돈의 경로가 철강재보다 복잡했다.


조선소에서 걸려온 긴급 전화

그때 대한플레이트 박준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남해안의 한 조선기자재업체였다.

“후판이 필요합니다. 40밀리와 50밀리입니다.”

“물량이 얼마나 됩니까?”

“우선 600톤입니다. 다음 달까지 추가로 1,200톤이 더 필요합니다.”

“조선소 배정물량은 없습니까?”

“기존 철강사 물량은 선박 블록 제작분에 우선 들어갑니다. 보강재와 설비 받침대용 물량이 부족합니다.”

“납기는요?”

“일주일입니다.”


박준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국산 후판 유통가격은 톤당 100만 원 안팎으로 올라와 있었다. 수입재는 96만~97만 원에서 거래됐지만 필요한 두께와 폭을 모두 맞출 수 있는 물량은 많지 않았다.


후판시장은 열연과 달랐다.

열연은 폭과 두께가 비교적 표준화돼 있어 여러 수요처로 돌릴 수 있었다. 반면 조선·플랜트용 후판은 규격과 강종, 검사조건이 세분화돼 있었다. 가격이 맞아도 성적서와 납기가 맞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었다.


“결제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박준호가 물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조선소 검수 후 90일입니다.”

“저희에게는요?”

“60일 어음으로 부탁드립니다.”


박준호가 김민철을 바라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납품할 곳을 찾지 못하던 후판이 갑자기 귀해졌다.

그러나 귀해진 것은 모든 후판이 아니었다.

필요한 규격을 필요한 시점에 납품할 수 있는 후판만 부족했다.

김민철이 손을 내밀었다.


박준호가 전화기를 건넸다.

“청람철강 김민철입니다.”

“말씀 들었습니다.”

“조선소 발주서와 자재사양서, 검수조건을 보내주십시오.”

“물량은 확보할 수 있습니까?”

“서류를 먼저 보겠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을수록 먼저 봐야 합니다.”


김민철은 아크트레이솔루션의 채권자 목록을 떠올렸다.

그 회사도 항상 납기가 급했다.

급한 납기는 신용심사를 생략하게 만들었다. 공급을 중단하면 현장이 멈춘다는 말은 철강업체가 가장 거절하기 어려운 압박이었다.

제품이 급하다는 사실과 대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았다.


톤당 100만 원의 후판이 두 종류로 나뉘다

오후 1시, 청람철강과 대한플레이트 직원들이 재고목록을 펼쳤다.

창고에는 국산 후판과 수입 후판이 섞여 있었다.

국산 후판은 톤당 100만 원 안팎이었다. 조선·플랜트 수요가 하단을 지지했고 철강사들이 실수요 물량을 우선 배정하면서 유통시장 공급도 넉넉하지 않았다.

수입재는 3만~4만 원 낮았다.


그러나 가격 차만으로 대체할 수 없었다.

“이 수입재는 충격시험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품질관리 담당자가 말했다.

“이쪽 물량은 두께공차가 다릅니다.”

“40밀리는?”

“270톤 있습니다. 다만 폭이 발주서와 다릅니다. 절단하면 사용할 수 있지만 수율이 떨어집니다.”


박준호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낮은 가격의 수입재를 사용해도 절단 손실과 추가 가공비, 잔재 처리비를 더하면 국산 후판과 차이가 거의 사라졌다.

김민철이 물었다.

“국산 50밀리는 얼마나 있지?”

“창고에 180톤입니다.”

“나머지는?”

“철강사 배정을 받아야 합니다.”

“가능성은?”

“조선 직납과 프로젝트 물량이 먼저라 유통향은 제한적입니다.”


같은 톤당 100만 원의 후판이라도 가치가 달랐다.

창고에 있는 일반 후판은 판매상품이었다.

납기에 맞는 규격과 성적서를 갖춘 후판은 공정을 멈추지 않게 하는 핵심 자재였다.

조선기자재업체가 사려는 것은 철의 무게가 아니었다.

일정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라진 180톤

오후 3시, 품질관리 담당자가 창고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상무님, 50밀리 후판 수량이 맞지 않습니다.”

“얼마나 부족하지?”

“전산에는 180톤인데 실물은 72톤뿐입니다.”


김민철과 박준호가 곧바로 창고로 내려갔다.

야드 한쪽에는 후판이 규격별로 쌓여 있었다. 각 적치물 앞에는 강종과 두께, 폭, 길이, 중량이 적힌 표찰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50밀리 후판 적치구역은 예상보다 비어 있었다.

창고관리자가 출고기록을 가져왔다.

“지난주 세원구조로 108톤이 선출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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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은?”

“이번 현금 주문에 포함된 물량이라고 들었습니다.”

“누가 승인했지?”

“영업팀에서 긴급출고로 처리했습니다.”


김민철이 영업팀장을 바라봤다.

영업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기존 거래처가 아니어서 현금 조건을 붙였습니다. 대금이 들어올 예정이라는 확인을 받고 먼저 출고했습니다.”

“돈이 들어오기 전에?”

“현장이 급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현장으로 갔지?”

“수도권 물류센터입니다.”


김민철은 출고전표의 차량번호를 확인했다.

자금관리팀이 운송사에 전화했다.

차량의 실제 도착지는 물류센터가 아니었다.

외곽의 철강재 담보창고였다.

“담보창고라고?”

박준호가 물었다.

“세원구조에서 후판을 금융회사 담보로 입고시켰답니다.”

후판은 건설현장으로 가지 않았다.

돈을 빌리기 위한 담보물이 됐다.


구매자는 철강재를 사용할 의도가 아니라 철강재를 담보로 단기 자금을 조달하려 했던 것이다.

아크트레이솔루션과 연결된 회사가 현금을 보낸 이유도 조금씩 드러났다.

과거 거래망에서 확보한 자금을 이용해 후판을 매입하고, 그 후판을 다시 담보로 맡겨 더 많은 현금을 만들려는 구조였다.

철강재가 공장과 현장으로 이동하지 않고 금융회사 창고를 돌기 시작했다.


후판을 되찾으러 간 사람들

김민철과 박준호는 곧바로 담보창고로 향했다.

차량이 도착했을 때 후판은 이미 야드에 내려져 있었다. 표면에는 청람철강의 재고관리 번호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창고 책임자가 서류를 내밀었다.

“세원구조 소유물로 입고됐습니다.”

“대금이 완납되지 않은 물량입니다.”

“저희는 매입계약과 질권설정 서류만 확인했습니다.”

“소유권 분쟁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출을 중지해주십시오.”

“법적 근거 없이 중지할 수는 없습니다.”


김민철은 청람철강의 계약서를 확인했다.

특약란에는 ‘대금 완납 전까지 공급자가 소유권을 유보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거래에서 그 조항이 자동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건이 특정돼 있는지, 제3자가 선의로 권리를 취득했는지, 계약 내용이 실제 거래과정에서 일관되게 적용됐는지 검토해야 했다.

박준호가 후판 표찰을 사진으로 찍었다.

“코일번호가 아니라 판 번호가 남아 있습니다. 성적서와 대조할 수 있습니다.”


김민철은 법무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창고 책임자에게 임시 반출 중지 요청서가 전달됐다.

후판은 그날 밤 창고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청람철강이 되찾은 것은 아직 철판이 아니었다.

철판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지 못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조선소의 공정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담보창고를 나오는 길에 조선기자재업체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결정하셨습니까?”

“국산 50밀리 물량이 예상보다 줄었습니다.”

“그럼 납품이 어렵다는 뜻입니까?”

“일부는 가능합니다. 나머지는 철강사 배정과 다른 유통망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주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블록 조립 일정이 밀립니다.”

“결제조건을 바꾸셔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조선소 검수 후에야 대금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조선소에서 직접지급 확약을 받아주십시오.”

“협력업체에 그런 조건을 쉽게 해주지 않습니다.”

“청람철강도 60일 동안 후판대금을 대신 금융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후판이 없어서 공정이 멈출 상황입니다.”

김민철이 말했다.

“저희도 후판을 보냈다가 돈이 멈춘 경험이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김민철은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기존 거래분은 현금으로 결제한다.

추가 물량은 조선소 발주 확인서와 직접지급 약정을 받는다.

검수 지연이 발생하더라도 납품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일부 대금을 지급한다.


조선기자재업체는 한 시간 뒤 조건을 받아들였다.

조선소가 전액 직접지급을 보증하지는 않았지만, 발주금액 일부를 공급업체 계좌로 바로 지급하는 구조에 동의했다.

후판 252톤은 다음 날 출고됐다.

부족한 규격은 세 개 유통업체에서 나눠 확보했다. 가격은 조금씩 달랐고 운송경로도 복잡해졌지만 납기는 맞출 수 있었다.


김민철은 출고차량이 야드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전날 멈춰 있던 차량과는 달랐다.

이번 후판에는 사용처가 있었다.

발주서가 있었고, 성적서가 있었으며, 돈이 돌아올 경로도 확인돼 있었다.


결말 — 가격을 지킨 것은 수요가 아니라 경로였다

그날 저녁 후판시장은 여전히 강보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산 후판은 톤당 100만 원을 지켰다.

수입재는 96만~97만 원이었다.

조선과 플랜트 수요가 가격 하단을 받치고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그러나 김민철이 본 후판시장은 단순하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조선 공정을 멈추지 않기 위해 규격 후판을 찾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후판을 현장에 사용하지 않고 담보창고로 보내 현금을 만들고 있었다.


가격표에는 두 거래가 구분되지 않았다.

모두 톤당 100만 원 안팎의 후판이었다.

그러나 하나는 배를 만드는 후판이었다.

다른 하나는 부채를 연장하는 후판이었다.


김민철은 영업팀에 새 지침을 보냈다.

긴급 주문은 사용처와 자금출처를 동시에 확인한다.

계약자·입금자·수령자가 다르면 출고를 보류한다.

프로젝트 물량은 발주서와 직접지급 가능성을 우선 검토한다.

판매가격보다 자재가 이동할 경로와 대금이 돌아올 경로를 먼저 본다.

후판은 두꺼웠다.

하지만 거래의 안전을 가르는 선은 종이 한 장보다 얇았다.


이번 회차의 후판시장

구분가격주간 변동
국산 후판톤당 100만 원보합~소폭 상승
수입 후판톤당 96만~97만 원보합
국산·수입재 가격 차톤당 3만~4만 원보합

자료: 시장, 2026년 7월 27~31일 기준. 



다음 회 예고

강철의 계절⑮ — 멈춘 전기로

제강사들이 휴동에 들어가면서 철근 생산은 줄어든다.

그러나 건설현장도 휴가와 폭염으로 멈춰 공급 감소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톤당 102만5,000원의 기준가격과 86만5,000원의 유통가격 사이에서 제강사·유통업체·건설사가 서로 다른 원가를 주장한다.

그러던 중 청람철강에 대형 데이터센터 공사장의 긴급 철근 주문이 들어온다.

공사를 멈출 수 없다는 현장.

철근을 외상으로 보낼 수 없다는 유통업체.

그리고 지급보증서의 맨 아래에는 이미 회생채권자 목록에서 본 금융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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