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02일 (월)
누적 방문자 399,139
일일 방문자 2,378
~

강철의 계절 72화 — 같은 빛을 가진 두 코일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철강 코일이 놓인 항만 철강 현장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대표이미지

작업대 위에는 은빛 강판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국내 제강사에서 공급받은 용융아연도금강판이고 다른 하나는 수입된 코일에서 잘라낸 견본이었다. 똑같은 조명 아래에서는 표면의 빛깔도, 손끝에 닿는 차가움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공장 품질담당자 윤해진은 견본보다 두 장의 서류를 오래 들여다봤다. 기계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주문을 확정하는 사람들의 손만 늦어지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겠네요.” 생산관리팀장 오세진이 견본의 모서리를 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둘을 같은 물건처럼 받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해진은 답 대신 손가락으로 자재승인서의 빈 항목을 짚었다. 이 공장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반짝이는 표면이 아니라 완성품의 성형성과 도금 조건을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 이력이었다. 국내재든 수입재든 확인되지 않은 항목을 통과시킬 이유는 없었다.

가공라인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슬리팅 장치 옆에서 작업자가 다음 코일을 기다리는 동안, 공장장 강민욱은 달력이 아니라 수주 변경표를 살펴봤다. 납기는 고객이 정했고, 코일의 반입 시점은 거래처가 정했다. 그러나 출하 뒤 문제가 발견됐을 때 공정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람은 공장 안에 남는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격이 조금만 어긋나도 손익이 흔들리는 공장이었지만, 규격을 틀리게 받은 비용은 가격표에 표시되지 않았다.

“영업 쪽에서는 오늘 확답을 원합니다.” 세진이 말했다. “고객도 물량을 당장 늘리는 것은 아니고, 다음 작업부터 어디서 조달할지만 결정하자는 겁니다.” 민욱은 작업대에 놓인 견본을 내려다봤다. “그러면 더 분명히 해야지. 우리가 승인을 줄 수 있는 것은 물건의 국적이 아니라 확인한 조건이라는 걸.” 그는 해진에게 현물로 보관 중인 코일과 앞으로 들여올 코일의 증빙을 분리해 보자고 했다.

그 무렵 시내의 철강 유통회사에서는 같은 제품을 놓고 전혀 다른 종류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영업책임자 서동진이 받은 시장 자료에는 10월 말 국내 1차 유통가격이 적혀 있었다. 냉연강판과 산세강판은 각각 톤당 96만원, 용융아연도금강판은 113만원, 전기아연도금강판은 105만원이었다. 네 품목 모두 전주 대비 보합이었다. 판매 문의는 뜸했는데 가격표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이 정도 수입 감소면 국내 GI 값이 바로 뛰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입 영업사원이 물었다. 동진은 고개를 저었다. “수입이 줄었다는 것과 고객이 당장 더 사겠다는 건 다른 얘기다.” 그는 10월 1~24일 중국산 일반 용융아연도금강판 반입량이 6,692톤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47.9% 줄었다는 수치를 보여줬다. 그러면서 중국산 일반 냉연광폭강대는 2만8,454톤으로 0.7% 늘었다는 줄에 동그라미를 쳤다. 제품마다 공급의 압력도 달랐다.

책상 한편에는 무역구제 관련 기사도 놓여 있었다. 10월 23일 무역위원회가 중국산 아연·아연합금 표면처리 냉간압연제품에 대해 덤핑과 국내 산업 피해를 인정하고 22.34~33.67%의 덤핑방지관세 부과를 건의했다는 내용이었다. 결론처럼 읽기 쉬운 숫자였지만, 동진은 서류의 맨 위에 ‘권고 단계’라고 다시 적었다. 관세가 이미 모든 계약에 일률적으로 부과된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고객을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 수 있었다.

“고객에게는 뭐라고 답할까요? 내년에 오를 테니 지금 사라고 할까요?” 영업사원이 다시 물었다. “우리가 모르는 일을 안다고 말해서 계약을 따면, 나중에는 설명할 말이 없어진다.” 동진은 기존 통관 물량인지 앞으로 도착할 물량인지, 품질 승인된 규격인지, 제시 가격에 어떤 비용이 포함됐는지부터 구분하라고 지시했다. 가격 인상 전망을 팔기보다 거래가 성립할 조건을 적어 보내는 편이 느려 보여도 안전했다.

같은 견본, 다른 거래조건

오후가 되자 유통회사와 가공공장의 사람들이 한 작업대 앞에 모였다. 수입업체 담당자 문지아도 견본을 가지고 왔다. 방문객은 세 명이었지만 각자의 관심은 달랐다. 지아에게는 이미 보유한 코일의 회전이 중요했고, 동진에게는 고객과의 거래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해진은 도금 조건과 재질확인서를 보고 싶어 했고, 세진은 실제 반입 일정이 제품 생산일정과 어긋나지 않는지를 물었다.

“현재 보유분은 증빙을 다시 보내드리겠습니다.” 지아가 말했다. “다만 앞으로 발주할 물량은 통관과 조건을 확인한 다음에 견적을 확정해야 합니다.” 동진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기존 재고의 제안과 장래 입고분의 제안은 따로 표시하죠. 한 줄의 가격으로 합치면 안 되겠습니다.” 가공공장 쪽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던 것도 무조건 싼 가격이 아니라 어느 단계까지 책임을 확인할 수 있는지였다.

“표면은 비슷하지만 성형 이후까지 같다고 보증할 수 있습니까?” 해진이 물었다. 지아는 즉시 약속하지 않았다. “그 부분은 자료와 시험 결과로 확인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오히려 작업장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상대방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보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순간에 신뢰가 생기기도 했다. 해진은 별도의 시험과 고객 승인이 필요한 조건을 체크했다.

ADVERTISEMENT

기계 소리 사이로 민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승인된 재고로 가능한 작업 범위를 잡읍시다. 나머지는 서류가 돌아온 뒤에 정하겠습니다.” 세진은 생산계획표의 일부 칸을 확정하고 다른 칸은 남겨 뒀다. 당장의 매출을 위해 모든 칸을 채우는 대신 확인되지 않은 생산을 시작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남겨 둔 칸은 멈춤이 아니라 비용을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동진에게 재무팀장 한유경의 연락이 왔다. “가격을 유지하는 이유가 뭡니까? 재고가 부족해서입니까, 아니면 다들 버티는 겁니까?” 유경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대답은 하나가 아니었다. 도금강판 수입은 줄었고, 냉연 수입은 거의 비슷했다. 주문은 활발하지 않았으며 재고 부담은 품목과 업체마다 달랐다. 동진은 시장 전체를 한 가지 원인으로 묶어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규 입고분은 대금 조건부터 다시 보죠.” 유경이 말했다. “할인해서 내보낸 다음 채권이 남으면 싸게 판 의미가 없어집니다.” 동진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창고에 있는 물량이 현금이 되기까지는 주문, 출고, 검수, 청구, 회수라는 여러 단계를 지나야 했다. 거래처가 좋은 회사라는 평가만으로 그 과정이 단축되지는 않았다. 시세가 움직이지 않는 주간에도 유통업체의 위험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서명이 필요한 순서

저녁 무렵 가공공장으로 돌아온 해진은 두 코일의 시편을 다시 나란히 놓았다. 아침에는 어느 제품이 더 싸게 들어오는지가 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지금은 어느 제품이 확인된 서류와 함께 도착하는지가 결정의 기준이 돼 있었다. 실제 가격 차이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항목까지 숫자로 꾸미지는 않았다. 가격이 같아도 계약 조건은 다르고, 가격이 달라도 사용할 수 없는 자재라면 비교 자체가 무의미했다.

“품질 승인에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세진이 물었다. “시간보다 순서가 필요합니다.” 해진은 고개를 들었다. “재질 증빙과 표면 조건, 적용 공정, 그리고 고객의 요구사항을 차례로 맞춰 봐야 합니다. 오늘 보여 준 견본만으로 앞으로 들어올 모든 코일을 승인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진은 서류를 접지 않고 책상 한편에 펼쳐 놓았다. 서둘러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결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 현장을 덜 흔드는 날이었다.

지아는 귀가하는 차 안에서 거래처에 보낼 답신을 고쳤다. ‘가격 경쟁력 확보’라는 문장 대신 ‘보유 재고와 신규 수입분은 조건을 구분해 안내한다’는 문장이 들어갔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무역구제 절차를 확정된 비용처럼 더하지 않겠다고도 적었다. 당장은 이 문장들이 계약을 빠르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훗날 누가 무엇을 알고 거래했는지 남기는 기록은 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생산라인에는 승인된 코일을 사용하는 작업만 먼저 배정됐다. 미확인 물량을 무턱대고 밀어 넣지 않았으므로 일부 일정은 조정해야 했다. 반대로 작업이 시작된 구간의 책임과 자재 이력은 분명해졌다. 세진은 지연된 일정표를 보며 잠시 얼굴을 찌푸렸지만, 해진이 넘겨준 확인서에 서명을 마쳤다. 그 서명은 값이 오른다는 예측도, 값이 내린다는 확신도 아니었다. 확인할 수 있는 부분부터 진행하겠다는 기록이었다.

유통회사에서도 견적서가 두 갈래로 나갔다. 보유분은 현재 확인된 재질과 거래조건을 기준으로 안내했고, 향후 수입분은 조건 확정 뒤 다시 협의하기로 했다. 동진은 매출 보고서에 장밋빛 문장을 넣지 않았다. 품목마다 다른 수입 흐름과 정책의 단계, 고객의 승인 절차를 함께 적었다. 같은 은빛을 띤 두 코일이 서로 다른 약속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가격표는 끝내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냉연강판도 도금강판도 한 주 동안 숫자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숫자를 둘러싼 사람들은 움직였다. 한 사람은 확인되지 않은 관세를 단정하지 않기로 했고, 한 사람은 검증되지 않은 원재료를 생산계획에 넣지 않기로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서둘러 재고를 처분하는 대신 어떤 조건으로 회수할지부터 따져 봤다. 철강시장은 때로 가격이 아니라 서명의 순서가 바뀌는 순간부터 달라진다.

그날의 가격

2026년 10월 30일 기준 국내 1차 유통시장 자료다. 실제 거래가격은 거래 조건·규격·지역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품목가격주간 변동
냉연강판(CR)96만원/mt보합
산세강판(PO)96만원/mt보합
용융아연도금강판(GI)113만원/mt보합
전기아연도금강판(EGI)105만원/mt보합

자료 기준: Google Drive 「K스틸_2026-10-31 주간동향모음(소스).docx」 수록 2026년 10월 30일 냉연·도금 시장동향. 10월 23일 무역위원회 판단은 덤핑방지관세 부과 건의 단계이며 최종 부과 확정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작품의 인물·대화·거래 과정은 창작이다.

ADVERTISEMENT
RECOMMENDED CONTENT
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