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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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68화 — 652달러의 빈 칸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그날 항만의 크레인은 후판 묶음을 지면 위로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바닷바람에 밀린 물기는 적치장 바닥을 얇게 덮었고, 철판의 모서리마다 주황빛이 늦게 걸렸다. 해외구매 담당자 서은채는 작업자의 수신호보다 자신의 서류철을 오래 들여다봤다. 물건이 눈앞에 놓이는 순간에도, 아직 결제할 수 없는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여러 번 경험했다.

후판 적치장과 크레인, 안전모를 쓴 철강 구매담당자가 입고를 확인하는 밝은 회화풍 장면

서류의 첫 장에는 중국산 후판의 신규 오퍼가 있었다. 12월 선적분, 톤당 652달러, CFR 조건. 직전 3분기 오퍼보다 7달러 낮아진 수치였다. 금액만 보면 경쟁력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 아래 도착 예정일을 적는 칸은 비어 있었다. 선적월과 실제 작업장에 반입할 수 있는 날짜 사이에는 배의 일정, 통관, 운송, 검수라는 서로 다른 시간이 끼어 있었다.

은채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는 산업기계 제작사 생산관리팀의 오지훈이었다. “이번에 필요한 것은 후판 전체가 아닙니다. 첫 가공에 들어갈 규격부터 확정해야 합니다.” 은채는 바다를 보며 대답했다. “오퍼는 받았지만, 현장에 들어오는 날짜를 확약하지는 못했습니다.” 지훈이 되물었다. “그럼 주문서는 언제 내야 합니까?” “지금은 날짜를 쓰기보다, 날짜가 필요한 이유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제작사 사무실에서는 서로 다른 작업표가 같은 벽에 걸려 있었다. 생산관리팀이 만든 조립 순서표와 품질팀이 만든 재질 확인표였다. 지훈에게 중요한 것은 절단기를 세우지 않는 일이었고, 품질담당 윤해린에게 중요한 것은 절단 전에 재질과 치수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영업팀은 또 다른 압박을 받고 있었다. 납기를 늦추면 수요업체가 주문 자체를 줄일 수 있었다.

“수입재로 전부 바꾸면 원가를 줄일 수 있지 않습니까?” 영업팀장이 물었다. 해린은 작업표 아래를 짚었다. “규격이 같아도 우리 장비에 들어갈 절단 여유와 표면 상태를 검수해야 합니다. 서류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가공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 전에 확인할 수 있는 것과 도착한 뒤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나눠야겠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원자재 가격이 아니었다. 구매 담당자가 당장 가격을 확정해도 생산관리자는 시간을 확정할 수 없었다. 반대로 설비가 비어 있다고 해서 가공할 재료를 임의로 들일 수도 없었다. 생산표의 빈 칸을 메우는 데 필요한 것은 한 장의 수입 오퍼가 아니라, 작업 순서와 재고와 검수의 연결이었다.

은채는 유통업체의 실무자 박진성을 찾아갔다. 바닥에 놓인 후판은 얼핏 같은 두께처럼 보였지만, 제품마다 출처와 매입 시점이 달랐다. 외부 가격표에는 국산 후판이 톤당 90만 원 중반선, 수입 후판이 93만~94만 원 수준으로 적혀 있었다. 실수요가 활발하지 않은 시장이라 해도, 현장에서 바로 확보할 수 있는 재고가 무한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견적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견적과 출하 가능 물량은 따로 보셔야 합니다.” 진성이 말했다. 은채가 답했다. “가격을 먼저 잡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가격을 확정한 뒤 재고가 없는 걸 알면, 더 비싼 조건을 감수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현재 확보 가능한 규격부터 분리해 주세요.” 진성은 전산 목록 대신 옆 창고의 작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확인해서 주겠다는 말은 하지 맙시다. 오늘 눈으로 본 것만 알려 주세요.”

창고의 계량대에서는 작은 혼선이 드러났다. 전산상 같은 품목으로 묶인 재고 중 일부는 다른 고객의 가공 대기로 이미 표시돼 있었다. 숫자상 재고와 당장 출고할 수 있는 재고가 달랐다. 진성은 단번에 할인율을 올리겠다는 말을 삼켰다. 거래는 가격으로 시작하더라도 마지막에는 출고할 수 있는 물건이 결정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은채는 그 자리에서 계약금을 논하지 않았다. 대신 판재의 실제 규격, 가공 가능 여부, 출고 순서를 차례로 확인했다. 주문을 서두르는 것보다 확보 가능한 물량을 확인하는 시간이 먼저였다. 진성이 물었다. “그렇게 나누면 처음 예상하신 단가를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 대신 공장 정지 비용을 한 번 덜 계산할 수 있겠지요.” 은채의 답에 진성은 더 이상 큰 폭의 할인을 약속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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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면은 산업기계 제작사의 절단 작업장이다. 가공반장 정우철은 새로 도착한 주문서를 작업대 위에 올리고 금속 자와 도면을 나란히 놓았다. 톱날 소리 대신 환풍기의 낮은 울림이 들렸다. 절단할 재료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판부터 손댈지 확정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생산관리팀은 당장 필요한 부품과 뒤로 미룰 수 있는 부품을 다시 분류했다.

“먼저 가공해야 하는 쪽이 바뀌었습니까?” 우철이 물었다. 지훈이 대답했다. “대체 가능한 공정이 있는 쪽을 뒤로 보냈습니다.” “재고가 부족해서 공정을 바꾸는 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품질팀 확인을 앞당기고, 작업 지시서는 그 뒤에 내겠습니다.” 해린이 두 사람 사이에 서류를 놓았다. “두께와 재질뿐 아니라 가장자리 상태까지 검수 기준에 넣겠습니다. 절단 손실을 감추기 위해 검사 항목을 줄여서는 안 됩니다.”

영업팀장은 작업장 문 앞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는 고객에게 보낼 납기 답변을 미리 써 놓았지만, 그 문장에는 아직 생산관리팀의 확인이 없었다. “고객이 기다려 줄까요?” 그가 묻자 지훈은 작업표를 접었다. “막연히 기다려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확인된 구간부터 말하겠습니다.” 해린이 덧붙였다. “품질 확인 전에는 확정이라는 단어도 빼야 합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은채는 수입 오퍼를 다시 계산했다. 톤당 652달러에 가정 환율 1,380원을 적용하면 원화 환산 약 90만 원이다. 그러나 이 숫자는 CFR 기준의 단순 환산액일 뿐 통관, 금융, 내륙 운송, 가공, 지연에 따른 비용을 모두 포함하는 실착 원가가 아니었다. 수입품의 거래조건과 국내 재고의 즉시 가용성을 하나의 단가로 비교하면 결론은 지나치게 쉽게 나온다.

“3분기보다 7달러 낮으면 이번에는 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재무팀 담당자가 물었다. 은채는 고개를 저었다. “가격 변화와 구매 적합성은 다른 질문입니다.” “그럼 수입 계약은 접습니까?” “아니요. 지금 필요한 물량과 이후에도 필요한 물량을 구분하겠습니다. 수입 오퍼는 가격이 아니라 선적·도착·품질확인 조건까지 확정된 뒤에야 구매 판단을 하겠습니다.”

그때 유통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진성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조심스러웠다. “확보 가능한 국산 후판의 규격과 출고 조건은 정리했습니다. 다만 미확정 부분은 따로 표시했습니다.” 은채가 되물었다. “미확정 부분에 날짜를 임의로 넣지 않은 거죠?” “그렇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걸 확정으로 쓰면 다음 거래가 어려워집니다.” “좋습니다. 그 서류를 먼저 보내 주세요.”

은채가 선택한 것은 전량 국산도 전량 수입도 아니었다. 당장 공정이 멈출 수 있는 구간은 확인된 국내 재고의 검수·가공 가능성을 우선 점검하고, 12월 선적 오퍼는 추후 필요한 구간을 대상으로 조건을 더 확인하기로 했다. 규모나 납기일을 성급하게 고정하지 않았기에 거래서류에는 아직 빈 칸이 남아 있었다. 그 빈 칸은 미숙함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처럼 쓰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퇴근 무렵 항만에 다시 나간 은채는 기중기가 내려놓은 후판 묶음을 지켜봤다. 쇳덩이는 무겁지만, 거래의 판단은 묘하게 가벼운 숫자 하나에 끌리기 쉽다. 해외의 오퍼가격과 국내의 유통가격 사이에 벌어진 간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간격을 실제 납품으로 연결할 수 있는가였다. 그 연결이 틀어지면 저렴한 원료도 제작사의 손실로 돌아온다.

지훈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확인된 규격을 기준으로 생산 순서를 다시 편성했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은채는 서류철에서 652달러라는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하고, 그 옆의 빈 칸을 지우지 않았다. 내일은 가격을 더 잘 알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거래가 남긴 가장 정확한 기록은 아직 모르는 것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날의 가격

가격은 2026년 10월 24일자 K스틸 통합 원자료에 수록된 10월 중순~23일 시장 정보에 근거했다. 달러 환산은 원자료에 제시된 가정 환율 1달러=1,380원을 적용한 참고치이며 실제 거래 원가를 뜻하지 않는다.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후판 SS400 유통톤당 90만 원 중반선(약 690달러, 환산 참고)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수입 후판 국내 유통톤당 93만~94만 원(약 674~681달러)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중국산 후판 12월 선적 오퍼(CFR)톤당 652달러(약 90만 원 단순 환산)주간 미제시·3분기 대비 7달러 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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