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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54화 — 표면처리 샘플실의 늦은 전화

냉연도금 거래의 가격·승인·납기 판단을 상징한 회화형 에디토리얼 장면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오전 여덟 시를 조금 넘긴 시간, 수도권 외곽의 한 표면처리 가공업체 샘플실에는 아직 형광등 두 줄만 켜져 있었다. 영업팀장 강민호는 책상 위에 냉연강판과 아연도금강판의 시황표를 나란히 놓고 있었다. 냉연강판은 국내산이 톤당 97만~99만 원, 수입산이 93만~95만 원. 아연도금강판은 국내산 112만~114만 원, 수입산 107만~109만 원이었다. 한 주 동안 가격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표 안의 숫자 사이에는 움직이지 않는 시장만큼이나 무거운 질문이 끼어 있었다. 국내산 아연도금강판과 수입산의 격차는 약 5만 원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거래처 구매팀장 박재성이었다.

“강 팀장님, 수입재 쪽은 여전히 다섯만 원 정도 낮습니다. 이번에는 가격을 좀 맞춰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민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출근 차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 번 더 시황표를 내려다봤다.

“가격 차이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건은 단가만 놓고 보면 답이 너무 빨리 나옵니다.”

“구매팀은 빨리 답을 내야 합니다. 원가 절감 숫자는 오늘 보고해야 합니다.”

“그 숫자가 납기하고 승인까지 포함한 숫자인지는 같이 봐야 합니다.”


박 팀장은 짧게 웃었다.

“결국 국산을 쓰자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아닙니다. 싼 물량을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싼 물량이 언제부터 우리 공정의 물량이 되는지를 확인하자는 얘기입니다.”


전화를 끊은 민호는 품질보증 과장 윤서진을 샘플실로 불렀다. 서진은 책상 한쪽에 놓인 도금재 시험편을 들어 빛에 비춰봤다. 제품명도 공급사도 적혀 있지 않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회색 금속 조각이었다.

“수입재로 바꾸면 승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민호가 물었다.


“시간보다 순서가 문제입니다. 아연 부착량, 표면 상태, 가공성, 고객 공정 조건을 다시 봐야 합니다. 같은 아연도금강판이라고 해서 바로 같은 자리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가격 차이가 꽤 납니다.”

“그래서 더 서두르면 안 됩니다. 다섯만 원을 아끼고 불량 한 번 나면 구매팀이 아낀 숫자보다 훨씬 큰 비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서진은 시험편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도금강판을 둘러싼 통상 규제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원산지와 소재 이력을 묻는 고객이 늘면, 품질 승인만이 아니라 서류 승인도 거래 조건이 됩니다.”


그 말은 시황표 다른 쪽에 적힌 시장 배경과 맞닿아 있었다. 국내 철강재에 대한 무역구제 조치는 과거 일부 품목에 머물지 않고 보통강 판재류로 넓어지고 있었다. 원자료에는 도금강판 관련 규제가 14건으로 판재류 가운데 가장 많았고, 일본에서도 한국산 용융아연도금강판에 대한 반덤핑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민호에게 그것은 거창한 통상 뉴스라기보다, 고객이 앞으로 더 많은 서류를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열 시가 되자 재무팀 대리 오지훈이 샘플실로 들어왔다. 그는 제품보다 거래처의 결제일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이번 업체, 단가 조정 요청과 함께 결제 조건도 늘려 달라고 했죠?”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가는 수입재 기준으로 낮추고, 결제는 지금보다 늦추고 싶어 합니다.”


지훈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거래처별 여신표를 펼쳤다.

“가격만 낮추면 마진이 줄고, 결제까지 늦추면 현금이 더 오래 묶입니다. 둘을 동시에 주면 매출은 남아도 돈은 안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거래를 놓칠 수도 없잖아요.”

“거래를 지키는 것과 조건을 다 내주는 건 다릅니다. 어느 조건을 지킬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민호는 오후에 예정된 거래처 방문을 취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품질팀과 재무팀의 말을 한 장짜리 메모로 정리했다. 첫 줄에는 가격, 둘째 줄에는 승인, 셋째 줄에는 결제, 마지막 줄에는 납기라고 썼다. 어느 항목에도 답은 적지 않았다.


점심 직전에는 물류관리 반장 김태식과 창고를 한 바퀴 돌았다. 포장된 도금재는 겉으로 보면 모두 비슷했지만, 태식은 코일마다 입고 순서와 고객별 출고 조건을 따로 기억하고 있었다. 민호가 “수입재가 들어오면 기존 재고와 같이 돌려도 됩니까?”라고 묻자 태식은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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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쌓는 건 쉽습니다. 같이 관리하는 게 어렵죠. 승인 전 물량이 섞이면 출고할 때 다시 골라내야 합니다.”

“창고 자리까지 따로 잡아야 합니까?”

“적어도 승인 끝날 때까지는 구분해 두는 게 낫습니다. 영업에서 가격만 보고 물량을 받으면 현장은 나중에 그 차이를 공간으로 치릅니다.”


민호는 그 말을 메모 아래에 덧붙였다. 가격 차이는 견적서에서 끝나지 않았다. 품질팀에서는 시험 순서가 되고, 재무팀에서는 회수기간이 되고, 창고에서는 구분 적치와 출고 동선이 됐다. 같은 톤당 가격이라도 부서마다 전혀 다른 비용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냉연과 도금재 유통가격이 보합이라고 했지만 회사 안에서는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았다.


오후 두 시, 박재성 구매팀장과의 미팅에는 생산관리 차장 최은호도 들어왔다. 최 차장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재고 얘기부터 꺼냈다.

“저희는 가격보다 끊기는 게 더 무섭습니다. 수입재 전환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데, 승인 때문에 한 번이라도 생산 일정이 밀리면 구매팀 절감액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박 팀장이 민호를 바라봤다.

“그러면 공급사 쪽에서 할 수 있는 제안이 뭡니까? 국산 가격을 그대로 받고 기다리라는 답은 곤란합니다.”

민호는 준비해 간 메모를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한 번에 하나만 바꾸자는 겁니다. 긴급 생산분은 기존 승인재를 유지하고, 수입재는 별도 샘플 승인 절차를 밟죠. 승인 전에는 가격이 아니라 품질과 납기 검증부터 끝냅니다.”

“그러면 구매단가 절감 효과가 바로 안 나옵니다.”

“맞습니다. 대신 공급이 끊길 가능성도 같이 낮아집니다.”

“결제 조건은요?”

“기존 거래분은 지금 조건을 유지하겠습니다. 다만 단가 인하와 결제 연장을 동시에 적용하는 조건은 받기 어렵습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박 팀장은 손가락으로 메모의 ‘승인’이라는 글자를 두 번 두드렸다. 최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구매팀장은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은 얼굴이었다.

“시장에서는 가격이 안 움직인다는데 왜 조건은 더 팽팽해지는 겁니까?” 그가 물었다.


민호는 냉연 시황을 떠올렸다. 현대제철은 10월부터 냉연을 포함한 주요 판재류 공급가격을 톤당 4만 원 인상하기로 했지만, 유통시장의 냉연과 아연도금강판 가격은 아직 전주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위에서는 원가를 이유로 가격을 올리려 하고, 아래에서는 수요 부진 때문에 가격을 올리지 못하는 시기였다.

“시장가격이 그대로라는 건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올리려는 쪽과 버티려는 쪽이 같은 자리에서 멈춰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단가 하나보다 조건 전체를 봐야 합니다.”


박 팀장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그럼 수입재는 샘플 승인부터, 기존 물량은 납기 우선. 단가와 결제 조건은 묶어서 다시 보자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둘 다 한꺼번에 바꾸면 어느 쪽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나중에 알 수도 없습니다.”


미팅은 그 자리에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구매팀은 즉시 큰 폭의 절감 숫자를 가져가지 못했고, 민호 역시 추가 물량을 확보했다는 보고를 할 수 없었다. 대신 양쪽은 수입재의 샘플 승인 결과를 확인한 뒤 조건을 다시 협의하기로 했다. 당장의 거래를 확정하지 못한 것은 영업팀에는 기회비용이었다. 그러나 단가와 여신, 품질 승인, 납기를 한꺼번에 양보하지 않은 것은 현금흐름과 거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비용이기도 했다.


해가 기울 무렵 민호는 다시 샘플실로 돌아왔다. 아침에 놓여 있던 시험편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시장가격도 아침과 같았다. 하지만 오전에는 단순히 다섯만 원의 차이로 보였던 숫자가 오후에는 품질 승인과 납기, 결제조건, 원산지 서류까지 달고 있었다.

그때 박 팀장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강 팀장님, 오늘 결론은 못 냈지만 방향은 알겠습니다. 샘플부터 보내주세요. 대신 승인 끝나면 가격 얘기는 다시 세게 하겠습니다.”

민호가 웃었다.

“그때는 저도 숫자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시황표를 접지 않았다. 가격이 멈춘 주간에도 거래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먼저 바꿀 것인지, 무엇은 끝까지 남겨둘 것인지가 달라질 뿐이었다. 샘플실의 늦은 전화는 그날 계약을 끝내지 못했지만, 거래를 깨뜨리지도 않았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냉연강판(1mm SHEET, 수도권 1차)국내산 97~99만원/톤 · 수입산 93~95만원/톤국내·수입 보합
아연도금강판(1.2mm SHEET, 수도권 1차유통)국내산 112~114만원/톤 · 수입산 107~109만원/톤국내·수입 보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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