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연휴를 앞둔 아침, 수도권의 한 후판 유통·가공센터 사무실에는 평소보다 일찍 불이 켜졌다. 구매팀장 윤태식의 책상 위에는 서로 다른 두 장의 견적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국내산 후판, 다른 하나는 수입산 후판이었다. 시장의 기준선은 국내산이 톤당 96만~98만 원, 수입산이 93만~95만 원이었다. 숫자만 보면 차이는 크지 않았다. 문제는 10월부터 주요 판재류 공급가격을 톤당 4만 원 올리겠다는 철강사의 방침과, 그 인상분이 실제 유통가격에 얼마나 반영될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윤태식은 가격표보다 납기표를 먼저 넘겼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이번 주 몇 만 원의 차이가 아니었다. 연휴가 지나고 주문이 다시 움직일 때 국내산 가격이 올라 있을지, 반대로 수요 부진이 계속돼 인상분이 시장에서 무너질지가 더 중요했다. 잘못 사면 비싼 재고가 되고, 너무 늦게 사면 납기를 놓친다. 후판은 같은 두께와 강종이라도 사용처와 승인 조건이 달라, 단순히 싼 물량으로 바꿔 끼우기도 어렵다.
오전 8시, 서로 다른 두 장의 견적
같은 시각, 영업팀장 박선우는 거래처에서 온 발주 문의를 다시 읽고 있었다. 조선용이 아닌 일반 가공 물량이었지만 납기는 빠듯했다. 그는 구매팀 자리로 와 견적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국내산은 지금 잡아두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10월 인상 공문이 나온 이상 거래처도 결국 가격이 오른다고 생각할 겁니다.”
윤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공급가격 인상과 유통가격 상승은 같은 말이 아니야. 수요가 받쳐주지 않으면 공문만 올라가고 실제 거래는 그대로일 수도 있어.”
“그래도 수입산하고 차이가 3만 원 정도면 국내산 쪽이 설명하기 편합니다. 납기와 승인까지 생각하면요.”
“그 3만 원이 지금은 작아 보여도 재고가 몇 달 묶이면 다른 돈이 된다. 우리는 가격보다 회전일수를 먼저 봐야 해.”
두 사람은 같은 숫자를 보고 있었지만 계산법이 달랐다. 영업은 거래처가 떠날 가능성을 계산했고, 구매는 재고가 남을 가능성을 계산했다. 박선우에게 재고는 주문을 지키기 위한 보험이었고, 윤태식에게 재고는 현금을 묶어 두는 약속이었다.
시장에는 또 하나의 신호가 있었다. 중국산 후판은 8월 5만4,000톤이 들어왔고, 이 가운데 비조선향 물량은 9,000톤이었다. 전년 동월보다는 크게 늘었고 전월보다도 증가했지만, 올해 누계 비조선향 수입은 전년 동기보다 줄어 있었다. 조선향은 반대로 꾸준했다. 1~8월 중국산 후판 57만4,000톤 가운데 조선향이 46만3,000톤을 차지했다.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수입재가 늘었다’는 한 문장만으로 다음 달 재고 전략을 정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절단기 앞에서 계산이 달라졌다
오전 열한 시, 두 사람은 가공동으로 내려갔다. 생산반장 김민호가 절단 순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 작업표에는 납기가 임박한 물량과 재고 보충용 작업이 섞여 있었다.
박선우가 물었다. “반장님, 수입재로 바꿔도 되는 건 어느 쪽입니까?”
김민호가 도면을 접으며 답했다. “규격만 보면 가능한 게 있지만, 승인 서류가 붙어 있는 건 함부로 바꾸면 안 됩니다. 납기 급한 건 오히려 국내산이 안전합니다.”
윤태식이 말을 받았다. “그러면 재고로 먼저 사두는 것과 실제 주문에 맞춰 사는 걸 분리해야겠군.”
“맞습니다. 절단기는 강종을 안 따지는 것처럼 보여도 고객은 따집니다. 싸게 샀다가 다시 검토받으면 하루 이틀이 더 비쌉니다.”
그 말이 윤태식의 계산을 바꿨다. 그는 아침까지 국내산과 수입산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선택이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어떤 주문을 어떤 재고로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가격 차보다 승인과 납기의 조건이 먼저였다.
반대로 박선우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인상 전 국내산을 넉넉히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산반장의 말을 듣고 나니 모든 주문을 한 방향으로 묶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수요가 약한 시장에서 가격 인상만 믿고 재고를 늘리면 영업이 그 재고를 팔기 위해 가격을 먼저 낮춰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었다.
점심 직후 거래처 구매담당 서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 발주분은 기존 승인 조건을 그대로 맞춰 주셔야 합니다. 단가보다 일정이 먼저예요.”
박선우가 확인했다. “수입재 대체 가능성은 열어둘까요?”
“다음 물량부터는 검토할 수 있지만 이번 건은 어렵습니다. 서류 다시 돌리면 우리 쪽도 시간이 걸립니다.”
윤태식은 옆에서 통화를 듣고 메모를 지웠다. ‘수입재 전환’이라고 적어둔 줄이었다. 거래처가 말한 것은 더 비싼 것을 사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조건을 바꾸는 데 드는 시간이 가격 차보다 크다는 뜻이었다.
오후 네 시, 주문을 나누다
오후 회의에는 재무팀장까지 들어왔다. 재무팀은 10월 가격 인상 가능성보다 재고 회전과 결제일을 먼저 물었다. 구매팀과 영업팀이 각자 설명을 마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무팀장이 말했다. “인상 전에 많이 사서 이익을 남긴다는 가정은, 실제 판매가격도 같이 오른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합니다. 지금은 그 전제가 확실하지 않죠.”
박선우가 답했다. “대신 필요한 물량까지 늦추면 거래처를 놓칠 수 있습니다.”
윤태식이 두 장의 견적서를 나란히 놓았다. “그래서 주문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납기와 승인이 확정된 물량은 국내산으로 먼저 대응하고, 일반재 신규 재고는 주문이 확인되는 범위 안에서만 가져갑니다. 수입산은 가격만 보고 선매입하지 않고, 실제 고객이 승인 가능한 물량부터 검토하겠습니다.”
“그러면 인상 전에 재고를 쌓을 기회는 포기하는 겁니까?” 박선우가 물었다.
“그 기회가 진짜 기회인지 아직 모른다. 대신 납기를 지킬 물량은 포기하지 않는 거야.”
김민호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럼 절단 일정은 확정 주문 우선으로 다시 짜겠습니다. 재고 보충 작업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윤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결정은 화려하지 않았다. 가격이 오르기 전에 대량 매입해 차익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수입재 가격을 앞세워 시장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 기회를 스스로 내려놓는 선택에 가까웠다. 만약 10월 공급가격 인상이 시장에 빠르게 안착한다면 회사는 더 낮은 가격에 살 수 있었던 시점을 놓친 셈이 된다. 반대로 수요 부진이 이어지고 유통가격이 버틴다면, 비싼 재고를 떠안지 않은 것이 이익이 된다.
퇴근 무렵 박선우는 아침에 들고 왔던 두 장의 견적서를 다시 보았다. 이제 둘 중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국내산은 납기를 지키는 재고가 되었고, 수입산은 가격을 낮추는 카드가 아니라 승인과 주문이 맞을 때 꺼내는 선택지가 되었다. 같은 후판이지만 역할이 달라진 것이다.
윤태식은 책상 위 달력을 한 번 보고 서류철을 닫았다. 시장에서는 10월 가격을 두고 인상과 약세가 동시에 이야기되고 있었다. 공급자는 원가를 이유로 올리려 하고, 유통은 수요 때문에 망설이며, 수입재는 가격 차이를 유지한 채 들어왔다. 그 사이에서 유통업체가 실제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시장 방향이 아니라 자기 재고의 속도였다.
그날 아침 하나였던 후판 주문은 오후가 되자 두 갈래가 됐다. 하나는 지금 지켜야 할 납기였고, 다른 하나는 아직 기다려야 할 재고였다. 윤태식은 그 둘을 같은 가격표에 올려놓지 않기로 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내산 후판 | 96만~98만 원/톤 | 보합 |
| 수입산 후판 | 93만~95만 원/톤 | 보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