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새벽, 눈 덮인 들판 위로 기러기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기러기가 떠난 자리에는 발자국 몇 개가 선명하게 남는다. 그러나 해가 뜨고 눈이 녹으면 그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소동파는 이를 두고 ‘설니홍조(雪泥鴻爪)’라 했다. 눈 녹은 진흙 위에 남은 기러기의 발자국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남기는 흔적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때는 또렷했던 이름과 성취도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진다. 그렇게 보면 인생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지나온 자리에 어떤 상처와 온기를 남겼느냐로 평가받는지도 모른다.
철강업계에도 수많은 발자국이 남아 있다. 고도성장기 제철소 건설에 참여했던 기술자, 새벽마다 철근을 싣고 건설현장을 누볐던 운송기사, 거래처 부도를 막기 위해 밤늦도록 자금표를 들여다보던 유통상,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수출시장을 개척했던 무역상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언젠가 명함과 조직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킨 신용과 품질, 납기와 약속은 거래처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눈 위의 발자국은 녹아 없어지지만, 사람이 남긴 신뢰는 쉽게 녹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말은 부드러워져야 한다
중국의 옛말에 ‘강산이개 본성난개(江山易改 本性難改)’라는 표현이 있다. 강산은 바꾸기 쉬워도 사람의 본성은 고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젊을 때의 고집은 패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경험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고집이 되고, 후배의 말을 듣지 않으면 독선이 된다. 몸의 잇몸은 세월이 흐를수록 약해지고 부드러워지는데, 사람의 말과 성품은 오히려 송곳처럼 날카로워지는 경우가 있다.
철강 영업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랜 경험은 중요한 자산이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감각, 거래처의 신용을 판단하는 눈, 가격 변동에 대응하는 순발력은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변화하는 시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통했던 거래 방식이 오늘도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다. 전화와 인맥 중심이던 철강 유통은 전자상거래, 실시간 재고관리, 데이터 기반 가격분석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탄소배출과 공급망 실사, 무역규제 역시 철강 거래의 새로운 조건이 됐다.
오래된 철이 녹슬지 않으려면 표면을 닦고 새로 도장해야 한다. 사람과 기업도 마찬가지다. 경력은 쌓아야 하지만 생각은 굳어서는 안 된다.
한 철강 유통업계 관계자는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개 목소리가 크기보다 질문이 많다.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위험을 먼저 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을 완벽하게 파악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가르침에 가깝다.
그가 “나도 나 자신을 모른다. 다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오래도록 전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사업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손실 자체가 아니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가 더 위험하다.
재고를 잘못 매입했는데도 가격이 곧 오를 것이라며 버티고, 거래처의 신용이 흔들리는데도 오래 거래했다는 이유로 외상한도를 늘리고, 시장이 변했는데도 과거의 성공 방식을 고집하면 작은 판단 착오가 기업의 생존 문제로 번진다.
가격이 하락할 때 손실을 인정하고 재고를 줄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거래처의 위험을 점검하고 결제조건을 조정하는 것도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을 알면서도 체면 때문에 그대로 끌고 가는 일이 더 큰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기업은 고칠 수 있지만, 약점이 없다고 믿는 기업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진다.
철강인이 잘 먹어야 할 다섯 가지
사람은 음식을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입으로 먹는 것만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해진다.
건강한 삶을 위해 사람이 다섯 가지를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첫째,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
둘째, 물을 잘 먹어야 한다.
셋째, 공기를 잘 먹어야 한다.
넷째, 마음을 잘 먹어야 한다.
다섯째, 나이를 잘 먹어야 한다.
이를 철강인의 삶에 비춰보면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음식을 잘 먹는다는 것은 몸을 돌보는 일이다. 아무리 큰 매출을 올려도 건강을 잃으면 장부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 새벽 출하와 야간 접대, 잦은 출장과 스트레스에 익숙한 철강인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쉽게 무시한다. 그러나 설비도 정비하지 않으면 멈추듯 사람의 몸도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멈춘다.
물을 잘 먹는다는 것은 흐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어떤 그릇에도 자신을 맞춘다.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기업도 물과 같다. 가격이 오를 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줄고 경쟁이 심해질 때 새로운 판로와 품목을 찾는다.
공기를 잘 먹는다는 것은 시대의 분위기를 읽는 일이다. 탄소중립, 보호무역, 공급망 재편과 같은 변화는 보이지 않지만 기업을 둘러싼 공기와 같다. 공기를 읽지 못하면 숨이 막힌다. 국내 가격만 바라보던 시대에서 벗어나 중국의 생산정책, 미국과 유럽의 무역조치, 원료와 운임 변화까지 살펴야 한다.
마음을 잘 먹는다는 것은 탐욕과 두려움을 다스리는 일이다. 시장이 좋을 때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고, 시장이 나쁠 때 공포에 휩쓸리지 않는 평정심이 필요하다. 철강 사업은 가격보다 심리 때문에 더 크게 흔들릴 때가 많다.
나이를 잘 먹는다는 것은 경험을 권위가 아니라 배려로 바꾸는 일이다. 선배는 후배에게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는지 증명하기보다, 후배가 실수하지 않도록 길을 밝혀줘야 한다. 기업도 오래됐다는 사실을 자랑하기보다 오래 거래한 고객과 협력사를 어떻게 대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쉰 살의 얼굴과 오래된 기업의 표정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스무 살의 얼굴은 자연이 준 것이지만 쉰 살의 얼굴은 자신이 만든 결과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사람의 얼굴에는 살아온 시간이 쌓인다. 반복해서 지은 표정과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이 눈가와 입가에 천천히 새겨진다. 젊은 얼굴은 타고날 수 있지만 중년 이후의 얼굴은 살아온 태도가 만든다.
기업에도 얼굴이 있다.
오래된 간판과 큰 공장이 기업의 얼굴은 아니다. 고객이 그 회사를 떠올릴 때 느끼는 감정이 진짜 얼굴이다. 약속을 잘 지키는 회사인지, 어려울 때 책임을 피하는 회사인지, 가격이 오르면 계약을 뒤집는 회사인지, 불량이 발생했을 때 솔직하게 대응하는 회사인지가 기업의 표정을 만든다.
매출은 해마다 달라질 수 있다. 시장점유율도 오르내린다. 그러나 신뢰를 잃은 기업의 얼굴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철강사는 제품에 성분과 규격을 새기지만, 시장은 기업에 태도와 평판을 새긴다. 제품의 결함은 교환할 수 있어도 신뢰의 결함은 쉽게 교환할 수 없다.
존경받지 못하더라도 욕먹지는 말아야 한다
중년 이후에는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존경은 스스로 요구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직책이 높다고 존경받는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다고 존중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삶의 기준을 조금 낮추면서도 더 무겁게 세울 필요가 있다.
존경받지 못할지언정 욕먹지는 말아야 한다.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말아야 한다. 경쟁에서 반드시 이기지 못하더라도 거래 상대를 속이지는 말아야 한다.
철강 유통업에서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도 결국 신용이다. 시황이 좋을 때 함께 웃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가격이 급락하고 거래처의 자금 사정이 어려워질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계약을 지키고, 불리한 사실을 숨기지 않으며, 약속한 결제일을 맞추는 것은 거창한 경영철학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원칙을 수십 년 동안 지키는 기업은 흔하지 않다.
시장은 때때로 정직한 사람에게 즉시 보상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킨 기업이 손해를 보고, 편법을 쓴 기업이 앞서가는 일도 있다. 그러나 철강업은 한 번 거래하고 끝나는 사업이 아니다. 오랜 시간 반복해서 거래해야 하는 산업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결국 평판이 가격을 이긴다.
눈은 녹아도 신뢰는 남는다
설니홍조의 발자국은 눈이 녹으면 사라진다. 우리도 언젠가는 시장에서 물러나고, 사무실 책상 위의 명패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경쟁과 성취도 잠시 머무는 눈밭의 흔적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었던 기억,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약속을 지켰던 태도, 후배의 실수를 덮어주고 다시 기회를 주었던 마음은 사람의 가슴에 남는다.
철은 시간이 지나면 녹슬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신뢰는 세월 속에서 오히려 단단해진다.
인생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얼마나 많은 철강을 팔았는지가 아닐 것이다. 얼마나 큰 회사를 만들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도 아닐 것이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그 이름을 어떤 표정으로 기억하는지가 한 사람과 한 기업의 최종 성적표가 된다.
기러기는 이미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눈 위에는 잠시 발자국이 남아 있다. 우리 역시 오늘도 시장이라는 눈밭 위를 걷는다.
발자국이 오래 남기를 바라기보다, 누군가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도 부끄럽지 않은 길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이를 잘 먹는 철강인의 자세이며, 오래 살아남는 기업의 품격이다.